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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금)

美통상 압박에 이미 실패했던 ‘설득’ 전략만 내세운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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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한국산 철강에 53% 관세 부과안 발표하자 韓 “미국 설득하겠다”
여러 차례 실패했던 설득 전략, “원점에서 경제 논리로 전략 다시 짜야”

미국이 한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에 이어 한국산 철강에 대해서도 강력한 수입규제안을 발표하면서 통상당국의 대(對)미 통상 전략이 도마 위에 올랐다. 정부가 한미 동맹 관계를 지나치게 맹신하다 경제 논리로 대응했어야 할 미국과의 통상 이슈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이번 철강 제재에도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미국 측을 또다시 ‘설득’하는 전략으로 대응하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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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우방국 중 한국 유일하게 철강 제재… “韓 안보동맹 믿다가 뒷통수 맞아”

19일 산업통상자원부와 철강 업계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지난 16일(현지시각) 한국을 포함한 12개 국가의 철강 수입에 대해 53%의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이 담긴 무역확장법 232조 보고서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무역확장법 232조'는 대통령 직권으로 특정 수입품이 미국의 안보를 침해하는지 조사한 뒤 수입량을 제한하거나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무역 제재다.

미 상무부는 이번 보고서를 통해 “과도한 철강 수입이 미국 경제의 약화를 초래해 국가 안보를 손상할 위협이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철강산업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2011~2016년 평균 74%에 그쳤던 가동률을 80%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하고, 이를 위해선 철강 수입을 작년 37% 줄여야 한다는 게 미 상무부의 설명이다.

미 상무부는 철강 수입 감소를 세 가지 수입 규제 방안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봤다. 첫번째는 모든 국가의 철강 수입을 지난해 수준의 63%로 제한하는 쿼터를 설정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모든 수입 철강 제품에 24%의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이다. 세번째는 한국을 포함한 브라질·중국·인도·러시아 등 12개국에서 수입하는 철강에 53%의 관세를 부과하고 나머지 국가는 지난해 수준으로 수입을 제한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무부가 제안한 세 가지 수입 규제 방안을 참고해 최종 규제안을 오는 4월 11일까지 내놓을 계획이다.

문제는 이번 철강 제재에서 미국의 우방국 중 한국이 유일하게 53% 관세 대상 국가에 포함됐다는 점이다.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작년 미국에 가장 많은 철강제품을 수출한 국가는 캐나다(580만톤)였고, 이어 브라질(467만톤), 한국(365만톤), 멕시코(262만톤), 러시아(312만톤), 터키(225만톤), 일본(178만톤) 순이다. 상무부는 미국이 가장 많은 철강을 수입하는 캐나다(1위)를 포함해 일본(7위), 독일(8위), 대만(9위) 등 미국의 전통적인 우방국은 제재 대상에서 제외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한국 정부가 북한 문제에 과도하게 집중하면서 미국을 안보 동맹 관계로만 바라보고 경제 관계는 등한시한 점이 가장 큰 패착 요인이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1년 넘게 보호무역주의를 강조하며 무역 제재를 예고했는데 한국 정부는 미국이 동맹국인 한국에 과도한 제재를 내리겠냐며 안일하게 시간을 보내다 문제가 커졌다”고 분석했다. 정부가 안보 문제 경제 문제는 구분해서 다른 약을 처방해야 했음에도 같은 문제라 보고 똑같은 처방을 내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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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또 美 ‘설득’ 전략 내세웠지만 이미 실패 맛본 전략

아직 한국산 철강에 53%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세이프가드 등 고강도 무역제재를 가하고 있는 터라 한국 측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치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정부와 국내 철강업계는 미국 정부의 철강 수출국 수입규제 방안을 발표한 이후 부랴부랴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백운규 산업부 장관과 권오준 포스코 회장, 강학서 현대제철 사장, 임동규 동국제강 부사장, 이순형 세아제강 회장, 김창수 동부제철 사장, 박창희 고려제강 사장, 김영수 휴스틸 부사장, 송재빈 한국철강협회 부회장 등 철강업계 최고경영자(CEO)들은 미국의 수입 규제 조치가 시행되기 전까지 최대한 미국 정부를 설득해 한국 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산업부 관계자는 “미국 정부가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민관이 함께 미국 정부와 의회, 업계 등을 접촉해 총력전을 펼칠 것이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내릴 수 있는 결정에 따른 대미 수출 파급효과를 시나리오별로 정밀 분석한 후 한국 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방안을 적극적으로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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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백운규(왼쪽에서 두번째)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서울 강남구 한국기술센터에서 철강업계 관계자들과 함께 미국의 철강 수입 규제 방안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산업부 제공



정부의 이같은 설득 전략은 미국 측에 전혀 효과가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달 9일 정부는 미 상무부가 한국에 불리한 내용이 담긴 무역확장법 232조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다는 동향을 파악하고 강성천 산업부 통상차관보를 미국으로 급파해 미 측을 설득하는데 나선 바 있다. 미 상무부가 보고서 작성을 완료하기 전에 최대한 한국에 우호적인 내용이 담길 수 있도록 조율하겠다는 목표였다. 강 차관보는 “미 측에 일방적인 규제조치보다는 서로 간의 입장을 확인하고 객관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과물은 한국산 철강 제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뿐 아니라 미국 우방국 중 유일하게 한국이 제재 대상으로 포함되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또 미국이 한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모듈에 대해 세이프가드를 발동하기 직전까지도 미국 측을 설득하겠다고 강조했지만, 한국 정부가 받아든 성적표는 미 무역위원회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출했던 권고안보다 더 강한 수준의 세탁기 수입규제였다.

백운규 산업부 장관도 미 측 설득에 나서려고 했지만 불발됐다. 백 장관은 강 차관보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 지난달 17일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측 고위 관계자들을 직접 설득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측 인사들은 세계경제포럼(WEF·World Economic Forum) 연례 총회(다보스 포럼) 참석과 트럼프 대통령 취임 1주년 행사 및 연두교서를 준비하느라 백 장관과 만날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백 장관의 미국행은 결국 무산됐다. 산업부 관계자는 "현 상황에서는 백 장관이 미국으로 가더라도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미국 출장 계획을 취소했다"고 말했다.

◇ “한미 관계 원점부터 다시 따져봐야”

전문가들은 정부가 지금까지 펼쳤던 미국에 대한 통상 전략이 실패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상호교환’이라는 경제적인 논리에 따라 원점에서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고 본다. 현재처럼 한국 정부가 대미 무역흑자 규모를 줄이겠다고 선언하고, 미국으로부터 무기나 액화천연가스(LNG) 수입량을 늘리는 식의 저자세적인 조치는 오히려 미국 측이 한국에 더 많은 요구를 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최원목 교수는 “정부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미봉책에 불과한 자발적인 조치를 반복적으로 내세울 경우 미국 측과 협상할 때 내세울 무기가 고갈될 수 있다”며 “이제는 안보와 통상 등 미국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경제적인 수치로 분석한 뒤 한국의 득실을 따져 얻어야 하는 것과 내줄 수도 있는 것을 정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중요한 협상 테이블에서 교환 의제로 던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최 교수는 “한국 기업들이 미국의 국내법 소송을 통해 세이프가드나 철장 제재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권한 남용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판례를 쌓아나가야 하고, 한국 정부는 기업들이 소송을 원활히 진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세종=전성필 기자(feel@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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