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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월훈(月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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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훈(月暈)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우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

―박용래(1925~1980)('먼바다', 창비, 1984)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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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坑) 속 같은 마을의 외딴집 노르스름하게 익은 '모과(木瓜) 빛' 창문 안에서는 노인이 혼자 '기인 밤'을 견뎌내고 있다. 밤중에 홀로 깨어나 무나 고구마를 깎는 노인의 기침 소리와 겨울 귀뚜라미 소리는 사멸을 향한 이중창이다.

'모과 빛' 창문에 짚오라기의 설렘과 이름 모를 새들의 온기가 따뜻하게 어룽거리고, '월훈(달무리)'이 지고 함박눈이 들이친다. 서울로, 서울로, 향했던 우리 농촌의 뒷모습이고 매일을, 매일을, 정신없이 달려왔던 우리 노년의 풍경이다.

독거·기다림·기침 소리의 '늙음 3종 세트'에 더해진, 월훈·함박눈·귀뚜라미 소리의 '겨울밤 3종 세트'가 깊고 그윽하다. 1970년대 유행했던 영사운드의 '달무리'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적막한 밤하늘에 빛나던 달이~.




[정끝별 시인·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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