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 조련 ‘농후자’
18세기 그림 ‘태평성시도’의 일부. 염소를 곁에 둔 농후자가 원숭이 두 마리로 공연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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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 무대에 올라오자/동방에 온 사신은 손뼉을 친다/원숭이는 아녀자를 깜짝 놀라게 해/사람이 시키는 대로 절도 하고 꿇어도 앉네.”―박제가의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에서
조선 후기 다양한 공연 문화가 꽃피는 가운데 원숭이로 공연하는 걸 ‘후희(후戱)’라고 했다. 원숭이를 길들이고 조련하는 사람은 ‘농후자(弄후者)’라고 불렸다.
한반도에 서식하지는 않지만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원숭이를 키웠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원숭이를 나무에 오르게 하는 장면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차돈이 순교한 뒤 원숭이가 떼 지어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문인 이인로는 ‘파한집’에 “첩첩산중에 원숭이 울음소리뿐이구나”라는 시구를 남겼다. 조선 전기 문인 최수성은 원숭이를 길러 편지를 전하는 데 썼다는 기록이 있다.
원숭이는 외교 선물로 이 땅에 들어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동물은 국가 간 친선을 도모하는 수단이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매와 사냥개를 보냈고, 명나라와 일본에서 원숭이를 받았다. 원숭이는 사복시 관원이 맡아 키웠다. 태종 대에는 원숭이 수가 크게 늘어 궁 밖으로 분양했다. 원숭이가 탈출해 야생화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궁궐뿐 아니라 저잣거리에서도 농후자가 공연을 했다. 공연은 원숭이 습성을 이용했다. 원숭이가 높은 곳을 잘 오르는 점을 활용해 까마득히 높은 솟대를 세우고 끝에 먹이를 둔 다음 원숭이가 뛰어오르도록 했다.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에는 원숭이 두 마리에게 목줄을 매 높은 솟대에 오르게 하는 공연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갓을 쓴 농후자는 염소를 곁에 두고 있다. 원숭이가 염소를 타는 공연도 했을 것이다.
박제가가 쓴 ‘성시전도시’ 속 원숭이는 사람처럼 절하고 꿇어앉기도 한다. 원숭이가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조련한 공연이다. 이는 중국 사신에게 선뵐 만큼 진귀한 모습이었다.
조선 후기 문인 조수삼이 쓴 ‘추재기이(秋齋紀異)’에 ‘농후개자’라는 인물이 나온다. 농후개자는 원숭이로 공연하며 구걸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벌이가 시원치 않아 거지 행색을 면하지 못했던 것. 보는 사람이 감탄하며 돈을 낼 만큼 기묘한 재주를 선보이려면 원숭이를 혹독하게 조련해야 했지만 농후개자는 한 번도 원숭이에게 채찍을 들지 않았다. 또 아무리 피곤해도 집으로 갈 때면 원숭이를 어깨에 올려놓았다.
농후개자가 죽자 원숭이는 배웠던 대로 사람처럼 울면서 절을 해 돈을 구걸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돈을 추렴해 거지를 화장했다. 홀로 남은 원숭이는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불길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농후개자와 원숭이는 주인과 물건의 관계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동료였던 것이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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