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총리, 주변국 정상들과의 신뢰 형성으로 통독 반대 극복
남북 정상회담 성공 위해선 미국·일본과 신뢰 구축이 필수
이상렬 국제부장 |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는 “우리는 독일을 두 번 이겼다. 이제 그들이 돌아온다”고 대놓고 반대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유로화를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유럽 통합이 명분이었지만 독일의 힘을 빼기 위해서기도 했다. 무엇보다 옛 소련이 문제였다. 동독 땅엔 50만명의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동독은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맞서 소련이 만든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핵심이었다. 헬무트 콜 독일 총리는 난관을 돌파해야 했다. 그의 무기는 각국 정상들과의 신뢰였다. 그는 통일된 독일이 유럽의 위험이 아니라 이득이라고 끊임없이 설득했다. 독일의 자부심이었던 마르크화 대신 유로화 도입을 약속하고 미테랑의 의구심을 씻어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2억2000만 마르크 상당의 식량 원조와 50억 마르크의 차관으로 사로잡았다. 당시 일생일대의 개혁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던 고르바초프에겐 경제 원조가 절실했다. 그러나 보다 중요했던 건 콜이 고르바초프와 맺은 신뢰 관계였다. 콜은 미테랑과 힘을 합해 소련에 대한 경제지원을 망설이는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를 설득해냈다. 콜에게 최대 우군은 부시 대통령이었다. 미국은 통일 독일이 나토에 잔류해야 한다는 점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고, 콜은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르바초프와의 협상에서 그 점을 관철시켰다.
통독 전 10개월간 콜은 동분서주했다. 부시를 8번, 미테랑을 10번, 고르바초프를 4번 만났다. 신뢰는 그 결과물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문제의 운전대를 제대로 잡기 위해선 콜의 발자취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일본의 동의와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남북 정상회담의 성공은 쉽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과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흔들림 없는 신뢰를 구축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헤더 노어트 미 국무부 대변인은 최근 정례브리핑에서 “우리는 문 대통령과 강철처럼 단단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한 미국 대사가 1년 이상 공석인 상황, 아그레망(주재국 임명동의)까지 오고 간 주한 미 대사 내정이 갑자기 철회되는 사건, 평창 올림픽에 미국 대표단을 이끌고 온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굳이 한국 방문 전 일본에 들러 아베 총리와 대북 정책에 입을 맞추는 일 등을 보면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강철 같은 관계’가 아니다.
일본과는 손쓰기 어려울 정도로 불신이 깊어지고 있다. 일본 외교가에선 문재인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얘기가 퍼져있다. 일본 정부는 청와대가 한·일 정상회담에서 나온 얘기를 언론에 공표했다고 분개한다. 하지만 정작 우익 산케이신문엔 누가 작정하고 흘리지 않고선 알 수 없는 문재인-아베 대화 내용이 적나라하게 소개됐다. 지난 연말 개봉된 영화 ‘강철비’엔 북한이 핵 미사일을 한국이 아니라 일본으로 쏘는 장면이 나온다. 북한군 수뇌부는 그 이유를 “미국이 우리 말보다 일본 말을 더 잘 듣는다”고 설명한다. 기세등등했던 미국의 선제타격론은 쑥 들어간다. 미국에겐 일본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선제타격은 영화적 설정이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미국이 일본으로 기우는 이 장면을 영화적 상상력이라고만 여길 수 있을까.
남북 정상회담은 북한의 핵무기 제거와 한반도 평화 구축, 그리고 통일로 가는 역사적 관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한·미 동맹에 균열이 생기고, 일본이 딴지를 걸면 남북 정상회담의 성공엔 먹구름이 낄 수밖에 없다. 북한이 국제 사회의 제재와 압박 속에 대화의 장으로 나오려는 지금은 어쩌면 역사적 기회일지 모른다. 그 기회를 단단히 잡아챌 수 있으려면 동맹은 물론 주변국과 신뢰를 탄탄하게 구축해놓아야 한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독일의 통일 총리 콜이 남긴 메시지다.
이상렬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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