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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모두의, 모두를 위한 문화](3)장애인·외국인·노인…다 함께 즐기는 문화현장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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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는 실험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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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서울 대학로의 한 소극장. 뮤지컬 <당신만이>를 보러 온 이들의 달뜬 얼굴 사이로 여러 말과 손짓들이 오갔다. 젊은 연인의 소곤소곤한 소리, 외국인 관객의 중국어와 일본어 소리, 청각장애인 노부부의 고요한 수어(수화)가 한데 섞였다. 극은 한국어, 그중에서도 경상도 사투리로 진행된다. 과연 이들 모두가 같은 장면에서 웃고 울 수 있을까.

공연장에 들어서면 의문이 풀린다. 외국인과 청각장애인 관객의 좌석엔 미리 스마트패드가 설치돼 있다. 첫 화면에서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중 하나를 택하면 극 진행에 맞춰 해당언어로 자막이 뜬다. 검은 화면에 채도는 낮췄다. 뒷자리 관객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중국어 자막이 있으니까 극중 인물들의 이야기에 더 몰입할 수 있어서 좋아요. 자막이 없었다면 외국에서 공연을 볼 생각은 못했을 거예요. 한국 사람이 중국어 공연을 보러가도 마찬가지겠지요?(진쩌롄·27·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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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에 서 있던 청각장애인 민준홍씨도 “그간 공연을 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이렇게 한글 자막이 나오는 공연이 있어서 참 즐겁다”고 했다.

이 기기는 당초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마련됐다. 한국관광공사가 일부 공연제작사를 선정해 지원했는데, 자발적으로 청각장애인까지 대상을 확대해 사용하는 곳들이 생겨났다. 이날 공연에선 중국인 14명, 일본인 3명, 청각장애인 6명 등 23명이 기기를 이용했다. 누군가를 위해 낮춰진 장벽이 다른 이들의 발걸음도 가볍게 한 것이다. 문턱이 낮은 저상버스가 휠체어뿐 아니라 유모차 이용자들에게도 유용한 것과 마찬가지다. 제도화를 통해 대부분의 공연장에 도입된다면, ‘비장애인·한국어 사용자·건강한 청력 소유자’라는 조건 밖에 선 이들의 공연 선택권이 넓어질 수 있다. 노화로 귀가 어두워진 노인, 한국어가 서툰 이주민들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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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문화’를 위한 실험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대중과 가장 가까운 예술에 속하는 영화쪽도 속도를 내고 있다. 큰 줄기는 ‘폐쇄형’ 상영방식으로 잡혔다. 폐쇄형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보조기기를 제공해 각자 필요한 화면해설이나 자막을 수신받게 하는 것이다. 보조기기만 지급된다면 원하는 영화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선택해 볼 수 있다. 별도로 마련된 ‘배리어프리(화면해설과 한글자막 제공)’ 상영관을 통하는 현재의 ‘개방형’ 방식에서 접근 틀을 확 바꾸는 것이다. 개방형은 상영영화와 시간, 장소가 극히 제한된다. 상영관에 앉은 모두가 화면해설과 한글자막을 한꺼번에 보고 듣게 돼 장애유형별로 관람에 방해를 겪기도 한다.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는 지난해 폐쇄형 상영시스템 도입에 대한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국내에 도입 가능한 시스템을 추려서 장단점과 도입 단가, 편의성을 분석하는 작업으로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가 연구용역을 수행 중이다. 결과는 올해 상반기 안에 나온다. 영진위 다양성진흥팀 관계자는 “도입할 시스템을 정해서 올해 하반기, 늦어도 2019년 상반기엔 일부 상영관에서 시범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미 폐쇄형 시스템을 도입한 나라들이 있다. 지난해 발행된 영진위 해외통신원 보고서를 보면, 미국의 최대 극장 체인인 리갈 엔터테인먼트는 2013년 소니가 개발한 자막 안경을 6000개의 상영관에 도입했다. 안경을 쓰면 스크린 속 대사와 동기화된 자막 텍스트가 렌즈에 뜬다. 화면해설을 들을 수 있는 헤드셋도 제공된다. 최근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깔아서 각자 휴대폰으로 자막이나 화면해설을 볼 수 있는 기술도 이용된다. 독일은 앱과 연동되는 ‘정보 안경’을, 호주의 4대 영화관 체인들은 좌석 컵홀더에 끼워 쓰는 기기인 ‘캡티뷰(Captiview)’를 사용하고 있다.

기술은 여럿 나와있고, 또 개발 중이다. ‘선택’의 문제만 남았다. 영진위 연구용역팀은 스마트폰 앱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큰 물줄기를 잡은 상태다. 다음달 2, 5, 7일에 시연회를 열고 최종 검토 단계에 들어간다.

단, 앱을 갖춰 놓는다고 자연히 시스템이 정착되진 않는다. 영화제작 단계부터 ‘폐쇄형’ 상영을 고려한 자막과 화면해설이 만들어져야 스마트폰 앱을 통해 지원되는 영화가 늘어날 수 있다. 이 때문에 영화 제작·배급사와 영화관 사업자들의 의무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 김수정 대표는 “독일은 영화진흥원의 후원을 받은 영화는 배리어프리 판본 제작을 의무화하고 있다”며 “한국도 영진위 지원을 받는 영화가 많은데, 이들 영화부터라도 의무화하는 등 점진적인 제도 개선을 고민할 때”라고 말했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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