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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금)

[사진오늘] '늦봄', 봄을 그리워하다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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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8일에는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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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 [정원철 교수 판화]



(서울=연합뉴스) 문익환 목사. 늘 붙던 직책이라 '목사'를 붙여 불러야 익숙합니다. 호가 순우리말로 특이합니다. '늦봄'입니다. 1918년생이고 1994년 1월 18일 사망했습니다. 생존해 있으면 올해 만 100세입니다.

만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며 목사 안수를 받은 뒤 미국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습니다. 공동성서 책임위원으로 개신교와 천주교가 함께 한 성서 번역작업에 참여했습니다.

그 전후로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기 시작했으며 투쟁과 재판과 투옥을 반복합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처음 투옥됐으며, 1980년 5월에는 '내란 예비음모죄'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김대중 대통령 등과 함께 법정에 섰습니다. 모두 여섯 차례 복역했으며 기간을 합치면 약 10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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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군사재판에서의 문 목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윤동주, 문익환, 장준하는 숭실중학교 시절 '절친'이었다고 합니다. 숭실학교는 반일 민족의식이 강한 학교였습니다. 세 사람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인생을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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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시절의 문익환(왼쪽)과 윤동주 [연합뉴스 자료사진]



1975년 장준하 선생의 의문스러운 죽음 이후 문 목사는 유신독재 투쟁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통일운동에 집중하며 통일 관련 재야단체들의 구심점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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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행사장의 함석헌, 문익환, 김영삼 [연합뉴스 자료사진]



1989년 3월에는 '사고를 쳤습니다'. 국가보안법을 어기며 방북해 김일성 북한 주석과 2차례 면담하고 공동성명도 발표합니다. 같이 방북한 인사들과 기념 촬영을 한 모습입니다. 왼쪽부터 재일동포 정경모, 문익환, 김일성, 작가 황석영, 목사 유원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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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 기념촬영 [조선중앙TV=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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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3월 사면으로 출소하는 문익환 [연합뉴스 자료사진]



문 목사 사망 후인 1995년 7월에는 김일성 사망 1주기를 맞아 문 목사 부인 박용길 장로도 방북했습니다. 아래는 박 장로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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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통해 귀환하는 박용길 [연합뉴스 자료사진]



문 목사는 한국 현대사에서 '재야 통일운동' 상징이 됐습니다. 1992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습니다. 1994년 심장마비로 급서했습니다. 문 목사는 김근태, 전태일, 박종철 등과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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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서 치러진 노제 [연합뉴스 자료사진]



'통일의 이상을 실천한 운동가', '시대의 예언자', '통일과 민주를 꿈꾸는 시인' 등의 다양한 별칭으로 불리는 늦봄 문익환 목사. 물론 '이상만 앞세운 몽상가', '편향된 운동가'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습니다.

마침 위기로만 치닫던 남북관계가 고위급 회담으로 숨통이 트였습니다. 북한의 드러나지 않은 책략은 경계하더라도 통일에 대한 그의 꿈과 열정이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작은 디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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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하는 문익환 [연합뉴스 자료사진]



doh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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