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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책과 삶]성범죄엔 침묵의 카르텔 깨고 “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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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줄라

존 크라카우어 지음, 전미영 옮김 |원더박스 | 480쪽 | 2만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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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 휴거트와 보 도널드슨은 초등학교 때부터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2010년 9월 도널드슨 집에서 열린 파티가 끝난 뒤 휴거트는 소파에서 강간당한다. 뒤늦게 딸에게서 강간 사실을 들은 아버지 케빈 휴거트는 이렇게 말했다. “한밤중에 아이를 해치는 괴물이 딸의 오랜 친구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괴물’은 “복면을 하고 칼을 휘두르며 모르는 여성을 덤불로 끌고 들어가는” 낯선 존재가 아니다.

강간 사실을 밝힌다면? 휴거트의 친구 킬리 윌리엄스도 고등학교 동창에게 강간당했다. 전 남자친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네가 난잡하게 놀아서 그래. 다른 놈들과 붙어먹은 걸 강간당했느니 어쩌니 하면서 어물쩍 넘기려는 속셈이겠지.”

“왜 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까?” 미국 논픽션 작가 존 크라카우어가 르포르타주에서 좇아가는 건 이 질문이다. 그는 미국 몬태나 대학교 연쇄 성폭행 사건을 탐사하며 해답을 하나둘씩 찾아간다. 이 대학에선 2010년 9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9건의 성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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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앞의 두 사례에서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피해자들은 무고로 몰리는 걸 걱정한다. 데이비드 리삭 등 3명의 학자들이 8건의 연구를 분석해 2010년 발표한 ‘성폭력 무고 10년치 신고사건 분석’을 보면, 신고하지 않은 비율은 64~96%다. 신고해도 의심받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경찰이 첫번째 벽이다. 몬태나 대학이 있는 대학도시 미줄라 경찰청장이 연쇄강간 사건이 벌어졌을 때 한 말은 “강간 사건의 무고 비율은 50% 안팎”이라는 것이다. 경찰이나 검찰은 이 통계를 믿는다. 수사기관이 무고가 절반이라고 여기면, 피해자에 대한 접근은 적대적 신문으로 기울기 쉽다. 수사 관계자들은 유진 J 카닌의 ‘강간 무고’(1994)에 나온 무고 수치 45%를 근거로 든다. 저자는 카닌이 경찰관 말만 인용했다고 지적한다. 별도로 입증하지 않은 이 수치는 최근까지 수많은 웹사이트에서 악용된다. ‘악의적인 여성들의 거짓 신고로 결백한 남성 수천명에게 강간죄를 뒤집어씌운다.’ 이런 인식을 퍼뜨린다. 극우파를 대변하는 사이트 ‘남성의 목소리’(A voice for Men)의 핵심 이슈가 ‘강간 무고 급증’이다. 이슈는 반페미니즘과도 이어진다. 이 사이트의 보도 책임자는 “페미니스트들은 강간 위험을 내세워 정치적 권력을 거대하게 키우고 돈을 끌어들인다”고 말한다.

경찰과 검찰이 기소를 꺼리는 것도 신고를 주저하게 만든다. 피해자가 끝까지 가겠다고 해도 가로막곤 한다. 2012년 발표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내 강간 사건 신고율은 5~20%, 기소율은 0.4~5.4%, 가해자의 실형선고 비율은 0.2~2.8%다. 90% 이상이 법망을 빠져나간다는 뜻이다. 법정은 강간 피해자에게 또 다른 벽이다. 세실리아 워시번(가명)은 그리즐리 스타 쿼터백 조던 존슨에게 호감을 가졌지만 성관계를 할 생각은 없었다. 존슨에게 여자 친구도 있었다. 존슨은 워시본의 “그만하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강간한다. 존슨은 배심원 재판에서 결국 무죄를 받았다.

존슨 사건에서 저자가 비판하는 건 미국 사법체계의 근간인 ‘당사자주의’다. ‘소송 당사자에게 소송의 주도적 지위를 주어 당사자 상호 간 공방을 중심으로 심리를 진행하는 체계’다. 당사자주의는 결백한 사람들이 유죄 선고를 받을 가능성을 낮췄지만, 죄를 지은 사람이 무죄 방면되는 비율도 높인다. 저자는 당사자주의가 강간 사건에서 특히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피고 측 변호인들이 모든 술수를 동원해 피해자를 공격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때문이다. 존슨의 변호인이 법정에서 집중 부각한 것 중 하나가 워시본이 신음 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강간이 또 다른 강간으로 이어진다. 저자가 가장 심각하게 여기는 문제다. 리삭 등 몇몇 연구자들이 1991~1998년 보스턴대 남학생 1882명(임의표본)을 놓고 면접 조사했다. 120명(6.4%)이 강간범이고 이 중 들키지 않은 강간범은 76명이었다. 들키지 않은 강간범 중 63%가 이후 다시 강간했다. 이들이 저지른 강간은 최소 439건이다. 1인당 평균 14명에게 피해를 줬다. 이 결과를 스스로 믿지 못한 리삭은 2009년 해군 신병 1146명을 다시 조사했는데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조사 대상자들은 상대가 취한 상태를 이용하거나, 강제력을 사용한 걸 강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합의하지 않은 성관계가 강간이라는 인식도, 자신이 ‘괴물’이라는 인식도 없었다.

미줄라는 ‘강간 수도’라는 오명을 얻었다. 그런데 미줄라의 강간 사건 평균은 미국 도시 평균을 조금 밑돈다. 어느 곳에서든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다. 한국 현실은? 책은 최근 수년간 한국의 여러 강간 사건을 두고 벌어진 일에 대입해 읽어도 무리가 없다.

피해자들은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약물 남용 등에 시달린다. 앨리슨 휴거트 같은 이들이 저자의 취재에 용감하게 응했다. 저자는 “강간범들은 피해자의 침묵을 이용해 책임에서 벗어난다. 자기 이야기를 밝히면서 그런 침묵을 깨는 것만으로도 강간범에게 강한 일격을 날릴 수 있다”고 말한다. ‘드러내어 말하기’는 다른 피해자가 자기 이야기를 하도록 격려하는 역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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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내어 말하기’는 2017년 미국에서 실현됐다. 여러 여성들이 ‘미투’(#MeToo, 성희롱·성폭력을 나도 당했다) 캠페인을 벌였다. 파이낸셜타임스가 2017년을 압축하는 단어로 미투를 꼽았다. 타임은 ‘올해의 인물’로 미투 캠페인에 참여한 여성들을 선정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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