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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기둥 사이의 심오한 무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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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화 대가 윤형근 서거 10주기 추모전

매일경제

1981년작 `암갈색&군청색(BurntUmber&Ultramarine)`(64×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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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위에 번지는 기둥이 '뚝심'으로 보인다. 세파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화풍을 이어나가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진다.

단색화 대가 고 윤형근(1928~2007)은 추사 김정희의 서체에서 영향을 받은 수직적 기둥 형태 추상화를 고집스럽게 그렸다. 기둥 사이 여백은 무한 공간처럼 심오하다. 유화로 그렸지만 물감이 번지는 효과로 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한지는 그 모든 것을 조용히 품고 있다.

수묵의 정취가 가득한 그의 작품은 2014년 단색화 열풍을 타고 급부상했다. 지난 1월 세계 최정상급 뉴욕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 초대 개인전에서 5억~6억원대 작품이 모두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달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암갈색과 군청색 농담의 번짐을 보여주는 1992년 100호 작품이 2억6000만원에 팔렸다. 이학준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는 "윤형근 작품에서는 조선시대 선비정신이 느껴진다"며 "그림 가격 10억원을 넘긴 단색화 대가 박서보(86), 정상화(85)에 비해 저평가된 작가"라고 말했다.

윤 화백은 작고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올해 초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 전속으로 영입됐다. 미국 미니멀아트 대가 도널드 저드(1928~1994), 미국 조각가 리처드 세라(78), 일본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88)의 전시가 열렸던 곳이다. 내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도 대규모 개인전이 예정돼 있을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사후에 집중 조명되고 있지만 생전에도 저드의 찬사를 받았다. 1991년 서울 인공갤러리 개인전을 위해 방한한 저드가 윤 화백의 작품에 반했다. 저드는 "구조적으로 담백한 회화"라고 극찬하며 1993년 뉴욕에서 윤 화백의 개인전을 열어줬다. 아쉽게도 저드가 이듬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전폭적인 후원이 끊겼다. 야요이의 애인이기도 했던 저드는 동양 건축과 문화, 철학, 미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윤 화백의 사후 10주기를 맞아 1970·1980년대 제작된 한지 작업 중 엄선된 미공개 작품 15점이 전시된다. 2007년 작고한 이후 유족들이 작가 전속 계약을 체결한 서울 PKM갤러리에서 30일까지 관객을 맞는다.

생전에 주로 사용했던 코튼(면)이나 리넨(마직물)이 아니라 한지 작품만 모았다. 깊은 사색과 명상을 담는 데 한지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는 "작가는 물감이 스며들며 번지는 한지의 무한한 포용성에 굉장히 매력을 느꼈다. 군청색은 먹 느낌을 준다"고 설명했다.

매일경제

윤 화백은 1970년대부터 일관되게 군청색과 암갈색을 사용했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쓰러진 나무 뿌리에 영감을 받아 암갈색을 쓰기 시작했다. 가장 자연적이며 본질로 회귀하는 색이라고 생각했다. 테라핀유(소나무 줄기에서 추출한 식물성 기름)를 섞은 유화물감을 담뿍 머금은 붓으로 몇 개의 획만을 무심하게 그어 내려가는 중에 안료가 스스로 스며들고 다시 배어 나오기를 반복한다. 덧칠을 통해 먹색 경지에 도달하면서 내면에 집중했다. 서구 물감으로 동양 수묵화의 깊은 빛깔을 내면서 독창적 화면을 만들었다. 네모난 색면 속에 대담함과 단정함이 함축된 숭고미를 보여준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그림값이 비싼 김환기(1913~1974)의 제자이자 사위다. 1949년 서울대 미대 재학 중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했는데, 스승인 김 화백이 서울대 교수에서 홍익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 학교에 편입하도록 배려했다. 그 인연으로 1960년 김 화백의 장녀인 김영숙과 결혼하게 된다. 김 화백의 뉴욕 시기 전면 점화에서 볼 수 있는 캔버스의 물감 번짐 효과가 윤 화백의 번짐 기법에 영향을 줬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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