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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싱크로드] 크라쿠프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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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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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폴란드에서 10년 넘게 공부했던 아내에게 학부인 야기에우워 대학이 어떤 학교이고 동문 중에 유명인사가 누구냐고 물었다. 언제 들어도 신기한 대답이라 살면서 열 번도 넘게 물어봤다. 코페르니쿠스가 다녔던 대학 교정을 아내와 함께 꼭 찾아가보고 싶었다. 꿈이 실현된 것은 4년 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한겨울이었다. 오후 4시인데도 중세의 장중함이 오롯한 도시엔 때 이른 어스름이 깔려 한밤이 됐다.

현대인의 일상 어휘로 회자되는 위대한 천문학자의 자취를 좇는 시간여행에 들어섰다. 캄캄한 밤하늘에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불 밝힌 성 마리안 성당 앞에는 '폴란드의 셰익스피어'라는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동상이 서 있었다. 그 앞으로 유럽 최대 크기인 크라쿠프 시장 광장에는 노점상과 포장마차들이 가득 들어차 축제 분위기로 술렁였다.

왕관 모양의 고깔을 쓴 점원들이 산더미처럼 쌓은 소시지를 판매하는 노점에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국에선 오래전에 사라진 캐럴이 울려퍼지는 광장을 거닐면서 영영 상실한 줄 알았던 동심으로 돌아갔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중세도시의 오래된 포석 위로 따각따각 달리는 마차를 쫓으면서 광장을 거닐다 보니 따끈한 청주 한 잔이 간절해졌다. 커다란 오크통 모양의 컨테이너 하우스가 눈에 띄었다. 기대했던 대로 주점이었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포도주를 국자로 퍼서 머그컵에 담아줬다. 그좌네 비노(grzane wino·글뤼바인)라는 이름의 전통주였다. 길거리에서 떨다가 뜨거운 술을 마셔서인지 금세 취기가 올랐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서툰 영어로 옆자리 관광객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면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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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크라쿠프로 이끌었던 코페르니쿠스는 까맣게 잊었다. 광장을 벗어나 비스와 강변 언덕에 지어진 바벨성의 성곽을 따라 걸었다. 큰길 옆으로 이어지는 미로 같은 골목을 찾아들기도 하다가 예쁜 카페를 보면 하릴없이 들락거리면서 크라쿠프 시내를 쏘다녔다.

길거리 곳곳에 미국 배우 빌 풀먼을 닮은 훈남의 사진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10여 년 전 서거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크라쿠프에서 대학을 다니고 사제로 시무하면서 보냈던 청년 시절 모습이라고 했다.

"이 건물이 본관이야." 아내가 수백 년 된 듯한 낡고 사무적인 분위기의 건물을 가리켰다. 야기에우워 대학은 캠퍼스 울타리 없이 시내 곳곳에 강의실과 연구실이 산재돼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교정을 거닐던 중 문득 먼 곳에서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성 마리안 성당에서는 지금도 직접 나팔수가 꼭대기에 올라가 시보를 알리는 나팔을 불어." 아내의 설명을 들으면서 성당 쪽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어느 건물 옆에 세워진 동상이 눈에 띄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인체 비례의 평범한 동상이었다. 코페르니쿠스였다. 크라쿠프의 밤이었다.

[이창훈 여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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