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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굿모닝 내셔널]인간과 침팬지를 가르는 '적정기술' 보급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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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완주군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

"지속가능한 삶엔 도구 다루는 게 기본"

슈마허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가 시초

제3세계 주민 위한 값싸고 소박한 기술

전환기술·나눔기술·착한기술로도 불려

용접·목공·매듭 등 귀농·귀촌 필수 기술

침팬지와 인간은 모두 도구(연장)를 쓴다. 둘이 다른 건 침팬지는 단순히 도구를 있는 그대로 쓰지만 인간은 자신과 자신이 놓인 상황에 맞게 도구를 바꿔 쓴다는 점이다. 미국의 과학자 겸 정치가인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이 "인간은 도구를 만드는 동물(a toolmaking animal)"이라고 정의한 배경이다. 하지만 프랭클린이 규정한 인간상이 바뀌고 있다.

수차례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도구를 만들기는커녕 오랫동안 써온 구식 도구조차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져서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기업이나 기술자(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세태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삶을 주체적으로 살려면 기본적인 도구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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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완주군 용진면 완주군청 뒤편에 자리 잡은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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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이 마련한 &#39;농부에게 필요한 생활기술 학교&#39; 교육생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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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접은 녹일 용(鎔), 붙일 접(接)자를 써서 '쇠를 녹여서 붙인다'는 뜻이에요. 철 같은 금속에 열과 압력을 가해 접합하는 기술이죠."

지난 5일 전북 완주군 용진면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 완주군청 뒤편 빨간 벽돌로 지어진 단층짜리 조합 건물 옆 빈터에서 조합원 곽기준(52) 강사가 남성 12명 앞에서 용접에 대해 설명했다. 저마다 앞치마를 두르고 방광면(防光面)을 쓴 남성들은 완주에 귀농·귀촌을 했거나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교육생은 곽 강사의 지도에 따라 용접봉으로 불꽃을 튀기며 절단된 2개의 관을 직각으로 붙이는 작업을 했다. 중간중간 망치로 쇠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이 올해 시작한 '농부에게 필요한 생활기술 학교'다. 지난 5월과 9월에 이어 이번이 3기째다. 교육은 지난 4일부터 4박5일간 진행됐다. 귀농·귀촌 선배이기도 한 조합원들이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용접과 목공·전기·매듭 등 시골 생활에 꼭 필요한 기술만 추려서 가르쳤다. 전기 코드 빼기부터 전등 및 스위치 다는 법, 낫·칼 갈기, 화덕·난로·구들 만들기까지 다양하다. 곽 강사는 "기술 대부분이 간단한 원리와 방법만 따로 가르쳐주는 곳이 없는 데다 전문 직업으로 삼을 게 아닌데도 기술을 배우려면 몇 개월간 학원에 다녀야 하는 게 현실"이라며 "특히 용접의 경우 목공보다 간단하고 안전해 여성들도 쉽게 할 수 있다. 쇠를 다루기 때문에 일단 배우면 생활에 쓸모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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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이 마련한 &#39;농부에게 필요한 생활기술 학교&#39;에서 교육생들이 용접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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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용접 교육에 참가한 김경곤(61)씨는 수의사다. 2015년 말 완주군 상관면으로 주소지를 옮긴 김씨는 "20년 전 귀농을 위해 산 땅에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생태농원'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생활기술 학교에 지원한 이유도 생태농원에 필요한 트리하우스(Tree House·살아있는 나무를 활용한 주택)와 오두막·황토방 등을 직접 짓기 위해서다. 그는 "생태농원을 만들려면 기본적으로 나무와 철 등을 다뤄야 하는데 외부 인력만 데려다 쓰기엔 경비 부담이 큰 데다 기술자를 쓰더라도 내가 주축이 돼 작업을 지시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러 왔다"고 말했다.

교육생 강병삼(41)씨는 지난 2월 중국에서 오래된 가구 등을 수입하는 사업을 시작하며 완주군 고산면에 귀촌했다. 강씨는 "일상에 꼭 필요한 기술을 짧은 기간에 엑기스만 배우고 있다"며 "트럭에 짐 쌀 일이 많은데 효율적인 매듭법을 배우니 좋다"고 말했다. 그는 "시골 깊숙한 곳에 살다 보니 기술자를 불러도 며칠씩 기다리거나 오더라도 추가 출장비를 내야 한다"며 "어제 수도관과 전기 배선 원리 등을 배웠는데 교육생 모두가 만족스러워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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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이 마련한 &#39;농부에게 필요한 생활기술 학교&#39;에서 조합원 곽기준(52) 강사(사진 왼쪽)가 교육생들에게 용접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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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도시 출신인 교육생들이 조합에서 배우는 기술은 '적정기술'이다. 조합에 따르면 국내에 20여 년 전 소개된 '적정기술'은 당초 제3세계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개발됐다. '적정기술(Appropiate Technology)'이란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 1911~1977)가 1973년 출간한 『작은 것이 아름답다』란 책에서 제안한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란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슈마허는 대량생산 기술이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지적하며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 대중에 의한 생산 기술을 제안했다. 이런 기술이 저개발국의 토착기술보다는 우수하지만 부자들의 거대기술보다는 값싸고 소박하다며 '중간기술'이라고 불렀다. 슈마허가 제시한 '중간기술'은 이후 '적정기술' '전환기술' '대안기술' 등의 개념으로 발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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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이 마련한 &#39;농부에게 필요한 생활기술 학교&#39;에서 한 교육생이 용접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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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기술'이 적용된 물건은 다양하다. 큐드럼(Qdrum)이 대표적이다. 타이어 형태로 만들어진 물통이다. 큐드럼을 굴리면 멀리 있는 물을 편하게 옮길 수 있다. 식수가 부족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유용한 발명품이다. '생명을 구하는 빨대'로 불리는 라이프스트로(life straw·정수 빨대)도 '적정기술'로 꼽힌다. '적정기술'이 '원조기술' '나눔기술' '착한기술' '자급기술'로 불리는 이유다.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은 이런 '적정기술'을 개발하고 공유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다. 2013년 4월 각각 전국귀농운동본부 이사장과 사무처장이었던 정용수(69) 현 조합 이사장과 박용범(46) 조합 상임이사 등 전국에서 활동하던 발기인 9명이 의기투합해 조합을 만들었다. "'적정기술'이 농촌에 쓸모가 많을 것 같다"는 당시 임정엽 완주군수의 제안으로 완주에 둥지를 틀었다. 누에를 키우던 잠사시험장으로 쓰던 건물 2개(각 660㎡)를 완주군이 사들여 조합에 무상으로 내줬다. 조합은 건물 골격 등을 옛 잠사시험장 원형 그대로 살려 실습장과 전시장·사무실·교육장·창고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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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 건물 내부 모습. 옛 잠사시험장을 완주군이 사들여 조합에 무상으로 내줬다. 원형 그대로 조합 측이 실습장 등으로 쓰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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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조합에는 700여 명의 교육생이 거쳐갔다. 나이는 20~60대로 귀농·귀촌 주민이 60~70%지만, 지역 주민과 청년들도 적지 않다. 교육생 일부가 조합원으로 흡수되기도 했지만, 숫자는 많지 않다고 한다. 창립한 지 4년이 지난 지금 조합원 수는 41명으로 늘었다. 조합원들은 '적정기술'의 연구·개발·교육·보급·홍보 등을 맡고 있다. 정용수 이사장은 "조합은 그동안 '적정기술'을 연구하고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품을 개발하고 교육을 통해 전문인력을 양성해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적정기술'이라는 용어는 일반인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창립 멤버인 박용범 이사는 '적정기술'에 대해 "초보자 누구나 겁 없이 도전할 수 있는 만만한 기술"이라고 표현했다. 본인 역시 완주군 화산면에 귀촌한 박 이사는 "어릴 때는 망치질이나 톱질을 하는 아버지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부서진 계단도 아버지가 시멘트를 직접 개서 수선했다. 웬만해선 남한테 맡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적정기술'은 '아버지의 기술'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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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 안에서 한 교육생이 &#39;로켓매스히터&#39;에 땔감을 넣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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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관(54) 이사도 원래는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의 '교육생'이었다. 농사·목공·철공 등 '만능 재주꾼'인 그는 2013년 5월 전남 곡성에 '항꾸네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 이사는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도시와 달리 농촌은 해야 할 일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다"며 "잘 모르면 몸으로 때워야 하는 농촌에서 '적정기술'은 지속가능한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라고 강조했다.

조합 건물 안팎에는 조합원과 교육생들이 '적정기술'을 이용해 만든 물건들이 즐비하다. 실습장 안에는 서양의 난로와 동양의 구들을 접목한 '로켓매스히터'와 '개량구들'이 놓여 있다. 박 이사 등이 2015년에 개발한 '부넘기 화덕'도 그중 하나다. 부넘기는 아궁이에서 불이 넘어가는 길목을 말하는데, '불목'으로도 불린다. 시장이나 공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드럼통 화덕의 장점은 살리고 연기가 많이 나고 열효율이 떨어지는 단점은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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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 내부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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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에 있는 연장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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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에서 해마다 열고 있는 전환기술 전람회 &#39;나는 난로다&#39;가 적힌 칠판.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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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덕 투입구는 나무를 많이 넣을 수 있게 너무 좁지 않게 하되 비스듬히 꽂아 나무가 자동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구들의 부넘기 원리를 이용해 불꽃이 넘어가는 틈을 만들어 열전도율을 높였다. 박 이사는 "스테인리스강 재질이라 튼튼하고 가벼우면서도 나무 젓가락 10개로 물 500ml에 든 라면 1개를 끓일 수 있을 정도로 화력이 세다"고 말했다.

조합 뒷마당에는 나무 구조물이 서 있다. 조합원들이 지난해 10월 만든 '달팽이 하우스'다. 거주 및 취사 등 전반적인 생활이 가능한 작은 집이다.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3.19m, 6.79m, 3.5m인 직육면체로 어른 키보다 높은 다락이 있고 그 밑으로 싱크대와 욕실이 배치됐다. 조합 측은 "집 구조가 단순하고 옮길 수도 있어 노인들이 살기 적당한 집"이라고 소개했다. 못 쓰는 목재 팰릿(pallet·화물운반대)으로 만든 의자도 눈에 띄었다. 박 이사는 "못과 망치·톱만 있으면 다른 자원을 안 쓰고도 폐자원을 활용해 만들 수 있는 물건이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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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이 만든 &#39;달팽이 하우스&#39;.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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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쓰는 나무 팰릿으로 만든 의자.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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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이 만든 수격펌프.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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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쓰는 나무 팰릿으로 만든 연장꽂이.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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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만난 조합원들은 "'적정기술'은 개발도 중요하지만 활용법을 널리 알리고 공유하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적정한 삶을 사는 것이 '적정기술'이 지향하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조합에서 '나는 난로다'란 주제로 전환기술 전람회를 여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달 초에는 '전환시대' 창간호도 나왔다. 적정기술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담은 소식지로 조합 측은 계절마다 펴낼 예정이다. 박 이사는 "누구나 기술에 소외되지 않고 자기 생활을 스스로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기술을 알리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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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완주군 용진면 완주군청 뒤편에 자리 잡은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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