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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3 (일)

[호암 이병철 30주기]미래를 내다본 눈, 삼성의 오늘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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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창업주 故이병철 선대회장 30주기 추도식. 사진=이수길 기자 leo2004@newsway.co.kr


[뉴스웨이 한재희 기자]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 회장의 30주기를 맞아 호암이 가졌던 기업가 정신이 재조명 받고 있다.

19일은 초일류기업으로 자리잡은 삼성의 기반을 닦은 이병철 창업주의 30주기다. 삼성그룹 총수 일가는 앞서 지난 17일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인근 선영에서 추모식을 열었다.

1910년 2월12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난 호암은 1987년 11월19일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호암은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과 도전정신으로 삼성의 토대를 닦았다.

호암은 자본금 3만원으로 정미소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운수사업과 토지투자 사업으로 승승장구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발발로 실패를 겪었다. 6.25 전쟁 후 제조업에 진출,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등 수입 대체 소비재 생산에 나서며 새로운 사업의 길을 열었다.

전자사업에 발을 들인 것은 1968년 삼성산요전기(현 삼성전자)를 설립하면서다. 당시 금성사(현 LG전자) 구인회 회장과 호암은 막역한 사이를 유지해오다 삼성전자 설립으로 사이가 멀어졌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호암은 “삼성의 ‘삼’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이며, ‘성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뜻한다”고 자서전을 통해 밝혔다.

특히 사업은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봤다. 호암은 “사람에게는 저마다 능력과 장점이 있다. 그것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국가와 사회에 대한 봉사이자 책임이 아닐 수 없다. 나의 국가적 봉사와 책임은 사업의 길에 투신하는 것이다”고 말하곤 했다.

자사전인 ‘호암자전’에는 “개인이 아무리 부유해도 사회가 빈곤하면 개인 행복을 보장받지 못한다. 나의 길은 사업보국에 있다”는 구절도 나온다.

삼성전자 이후 삼성중공업을 잇따라 설립하면서 전자와 중공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키워나갔다. 여러 부침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도전정신을 내세웠던 호암의 마지막 발자취는 반도체 사업이다.

1983년 이른바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 사업 투자를 결정했다.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호암 나이 73세때의 일이다.

반도체 제 3라인이 완공되기 2년 남짓 전인 1986년 초 라인 건설을 서두르라는 독촉을 하게 된다. 미국의 보복이 시작될 것 같다는 그의 예견대로 미국은 일본에 대한 무역제재를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에 압력을 넣어 일본은 메모리 반도체 생산의 25%를 줄였다.

그 덕에 256K D램 가격은 두 배로 폭등했고, 과감한 투자에 나섰던 삼성은 기회를 제대로 잡을 수 있었다.

호암은 삼성반도체통신 기흥 VLSI공장 준공식에서는 “일렉트로닉스 혁명에서 뒤쳐지게 되면 영원히 후진국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일본 등과의 현격한 기술 격차와 막대한 투자 재원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무모한 도전이라는 비판도 많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호암의 과감한 도전 정신이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1위 자리에 오른 지금의 삼성전자를 만든 셈이다.

호암은 1980년 7월 전경련 강연에서 “결심하기 전에는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계획이 확정되면 과단성 있게 실행하는 것이 사업가의 기본태도”라는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1987년 11월 19일 별세한 뒤 호암의 정신은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으로 이어졌다.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경영 전면에 나선 이 부회장은 호암 정신을 기반으로 삼성의 사업구조를 변화를 모색하며 미래를 준비 중이다.

한재희 기자 han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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