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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목)

[광화문에서/김선미]토닥토닥, 수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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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김선미 문화부 차장


그제 오후 2시 반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일하다가 부르릉 떨림을 느꼈다. 안마의자의 약한 진동과 흡사했다. 곧바로 강한 진동으로 휴대전화에 긴급 재난문자가 도착했다. 경북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난 것이다.

포항의 지진은 270km 떨어진 서울에 도달해 6시간 만에 대학수학능력시험 연기로까지 숨가쁘게 이어졌다. 그러자 나의 기억도 빛의 속도로 25년 전인 1992년으로 이동했다.

1992학년도 후기 대입학력고사를 하루 앞둔 1992년 1월 21일. 갑자기 바로 다음 날 예정이었던 시험이 연기됐다. 서울신학대에서 보관하던 학력고사 문제지가 유출된 게 이날 동아일보 1면 특종보도로 알려진 것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전기에 떨어진 슬픔을 가까스로 다스려 준비한 시험이 도둑맞은 문제지 때문에 미뤄지다니…. 황당하고 짜증이 났다.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로부터의 ‘추가 수험생활 20일’을 통해 작지만 중요한 삶의 가르침들을 배운 것 같다. 인생은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것, 인내하는 자가 결국 웃을 수 있다는 것….

한번 출발한 기억의 시간여행은 1980년대 초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3년간 포항에 살았다. 담벼락 낮고 운동장 너른 초등학교와 정겨운 바닷가, 서울로 온 이후엔 특별히 찾아갈 일이 없던 어린 시절의 그곳. 문득 포항에 친정을 둔 대학 후배가 떠올라 수화기를 들었다. “부모님 괜찮으셔?” “아, 아버지가 오랫동안 모은 분재와 어머니의 도자기 인형들이 다 깨졌대요. 여진(餘震)은 없을지, 오늘밤 부모님은 어디에서 지내셔야 할지 염려되네요. 연락 주셔서 고마워요. 선배.”

오후 8시 반. 당초 어제 치러질 예정이었던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포항의 지진으로 1주일 연기됐다는 정부 발표가 났다. 수험생 자녀를 둔 지인과 친구들이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단체방에 망연자실한 심정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게 실화냐”며 어이없다는 반응, 시험 앞두고 후련하게 학원에 문제집을 다 버리고 왔다는 재수생 사연, 추가로 생긴 1주일 동안 부모와 수험생이 어떻게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지 걱정하고 위로하는 대화들이 오갔다. ‘시험 보는 날’만 바라보며 그동안 마음 졸여온 얘기를 밤 깊게 듣다 보니 ‘너나 나나 입시에 모든 걸 거는 이 나라에서 전국 수험생의 운명이 달린 수능 일정을 굳이 연기해야 했을까’란 생각도 잠깐 들었다.

날이 밝았다. 아침 신문을 펼쳤을 때 눈물이 확 쏟아질 뻔했다. 우리나라 역대 두 번째 규모인 이번 지진으로 건물은 참혹하게 무너지고 차량은 파손돼 뒹굴고 있었다. 우리의 부모 형제 친구들이 사는 곳, 찬란했던 역사와 개발시대의 꿈이 깃든 그곳. 만약 수능이 연기되지 않았더라면 포항의 수험생들은 밤새 뜬눈으로 공포와 불안에 떨다가 시험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일부 지역 학생들 얘기라고 눈감아버리고 ‘내 아이’의 시험과 점수만 챙겼더라면…. 갑작스러운 시험 일정 변경은 참으로 당황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진과 그에 따른 수능 연기로 인해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챙겼고, 함께 사는 공동체의 힘을 확인했다.

재수생 딸을 둔 친한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어젯밤엔 짜증 작렬이더니 오늘은 안정을 찾고 씩씩하게 학원에 가더라고요.” 그 씩씩한 수험생에게 왠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25년 전 ‘연기된 대입 수험생’ 선배로서, 앞으로의 1주일을 격하게 응원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다음 주 주인공은 너야 너∼.”

김선미 문화부 차장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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