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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금)

“기본소득은 구호품으론 꿈도 못꿨던 ‘내 집·내 일’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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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계는 지금 기본소득 실험중] ① 케냐

케냐 마을서 18살 이상 성인 95명에

12년간 월평균 생활비 22달러 현금이체

미국 기브다이렉틀리 기본소득 파일럿

생계에 숨통 ‘계획·도전’ 가능해지고

여성 발언권 커지는 등 가정불화 감소

수급자 자존감 향상 사회화도 활발

빈부격차 분란소지 없애 ‘마을에 평화’

‘술·담배로 소비’ 수급자 중 2% 불과



한 사회 구성원 ①모두에게 ②개별적으로 ③조건없이 ④현금 소득을 ⑤정기적으로 지급하는 ‘기본소득’이 아이디어와 담론에서 바야흐로 실험 단계로 접어들었다. 제3세계부터 선진국까지 각국에서 소득불평등과 빈곤, 비효율적인 복지행정, 4차 산업혁명에 의한 일자리 감소 등 지속 가능한 삶을 위협하는 근본 문제의 대안으로 기본소득을 모색하고 있다. <한겨레>는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 중인 케냐·캐나다·핀란드 및 제17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가 열린 포르투갈 리스본 현지를 취재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기본소득 실험 책임자도 직접 만났다. 서로 다른 목표와 방법으로 기본소득을 실험하고 있는 국외의 전문가와 수급자를 만나 효과와 부작용 및 과제를 살펴봄으로써, 향후 국내 도입을 검토하고 토론하는 데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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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도주의 단체 기브다이렉틀리가 기본소득 파일럿 테스트를 하고 있는 케냐 서부의 한 마을에 사는 독신남 패트릭이 지난 10월10일 집 앞에서 기본소득으로 처음 산 염소한테 풀을 먹이고 있다. 케냐/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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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장기간에 걸쳐 정기적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현금을 조건 없이 받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할까? ‘기본소득을 주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까?’란 질문인데, 실증적 대답을 들려줄 수 있는 지구상 유일한 마을이 케냐 서부에 있다.

개발도상국인 케냐에서도 가난한 시골에서 나타난 변화를 일반화하는 건 조심스럽지만, 경제 수준의 차이보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공통점에 주목한다면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많다.

동아프리카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현금을 직접 지원하는 미국 인도주의 단체 ‘기브다이렉틀리’(GD·지디)는 지난해 10월 이 마을에서 기본소득 파일럿 테스트를 시작했다. 케냐는 보다폰과 영국 국제개발부가 개발한 모바일 결제시스템 ‘엠-페사’를 국민 96%가 매일 쓴다. 정부를 거치지 않는 현금 이체 실험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이 마을 주민의 하루 생활비는 케냐 시골의 평균과 같은 0.75달러다. 이 마을의 18살 이상 모든 성인에게 월평균 생활비 2250케냐실링(약 22달러·2만5000원)을 12년간 매달 이체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1년이 지났다. 첫 달 기본소득은 주민 45%가 평생 처음으로 한 번에 손에 쥐어본 가장 큰 액수였다. 지디는 이 마을에서 1년간 운영 세부사항을 점검한 뒤 이르면 올해 말부터 200개 마을로 실험을 확대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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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본소득을 주면 일을 안 할까?

“기본소득을 받은 뒤 일을 그만두고 싶어졌나?” 지난달 10일 첫번째 인터뷰이 패트릭(39)에게 기본소득에 대한 가장 흔한 우려를 물었다. 숯을 구워 파는 일을 주업으로 하는 독신남인 그는 “정반대”라고 말했다. “월말에 돈이 들어오는 걸 알기 때문에 계획을 세울 수 있고, 기본소득이 나를 더 활동적이고 더 많은 걸 성취하고 싶게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마을 주민 데니스는 날품팔이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었다. 몇달간 수입 없이 훈련을 받아야 하는 기술직 일자리는 엄두도 못 냈다. 데니스와 아내가 기본소득을 받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기본소득으로 가족의 끼니를 해결하고, 남는 돈으로 숯 굽기 부업을 시작해 생활비를 충당했다. 생계에서 숨통이 트인 데니스는 석 달간 무급 인턴으로 일한 뒤 고용되는 자동차 정비소에 취직했다. 데니스는 “3개월 뒤면 정비공 월급이 기본소득과 숯 이외에 또다른 수입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다.

이 마을에도 기본소득 수급 이후 일손을 놓은 수급자가 있다. 다만 도덕적 해이와는 거리가 멀다. 루시아는 팔순이다. 루시아가 낳은 25명의 자녀 중 23명이 세상을 먼저 떴고 지금은 막내아들과 산다. 옥수수 농사를 짓는데 “밤새 보초를 서지 않으면 다람쥐, 원숭이, 멧돼지가 밭을 다 망쳐놓고, 수확량이 아주 적어진다”며 “밤에 밭을 지키기엔 힘이 부친다”고 말했다. 그는 “기본소득으로 원하는 음식을 사 먹고, 더 이상 돈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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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도주의 단체 기브다이렉틀리가 기본소득 파일럿 테스트를 하고 있는 케냐 서부의 한 마을에 사는 팔순 루시아가 지난 10월10일 기본소득으로 들여놓은 수도에서 물을 받고 있다. 25명의 자녀를 낳아 23명을 잃은 루시아는 “기본소득으로 주식 옥수수 이외에 고기도 사먹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케냐/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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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업가정신·저축·투자·소비 등 경제에는 어떤 영향 미칠까?

정책 입안자들은 빈곤 구제 이외에 기본소득이 기업가 정신, 저축, 투자, 소비 등 경제에 미칠 영향에도 관심이 많다. 주민들은 “구매”, “계획”, “투자”, “저축” 등의 단어를 유난히 자주 언급했다. 특히 이 마을에서 주된 지출은 집과 관련이 있다. 집이 없는 사람은 흙집을 짓고, 흙집이 있는 사람은 모래와 시멘트로 개조를 하고, 개조할 필요가 없을 땐 가구를 들여놨다. 케냐에서는 집과 가구를 소유하는 게 존엄이고, 반대로 집과 가구가 없는 건 수치로 여긴다고 케냐 현지의 지디 대외협력팀장 캐럴라인 테티가 설명했다. 고정 수입이 없는 가수 겸 영화배우 아그리파(37)는 기본소득을 모아 어머니 집 바로 옆에 자기 집을 지었다. 인건비 등 8000케냐실링(약 9만원)을 들여 이틀간 지은 6.6㎡(2평) 남짓 흙집이지만 “평생 꿈꾼 내 집”이다. 가정주부 모니카(28)는 “모래를 사 집을 개조”했다. 두 자녀의 어머니 제인(21)은 “마을 사람들이 집을 고치려고 매달 금속 지붕을 사들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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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도주의 단체 기브다이렉틀리가 기본소득 파일럿 테스트를 하고 있는 케냐 서부의 한 마을에 사는 제인이 지난 10월12일 자신이 거실에 앉아 있는 모습. 제인은 기본소득으로 중고 옷감을 재가공해 파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소파 커버와 커튼도 제인이 만들었다. 케냐/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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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서 기본소득이 가져다준 ‘생활의 안정’은 장기적인 저축 및 투자와 도전을 이끌어냈다. 시내 미용실 직원으로 혼자 아이를 키우는 매릴린(21)은 머리를 만져주고 받은 돈을 주인과 반씩 나눈다. 주인이 직접 고객 머리를 만지는 날엔 빈손이다. 이렇게 버는 월평균 소득 1600케냐실링(약 1만8000원)으로는 어림없었지만, 기본소득 수급 이후 ‘내 미용실’이라는 목표가 생겼다. 매릴린은 “돈을 모아 5년 안에 최신 장비를 갖춘 내 미용실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제인의 경우, 나이로비에서 중고 옷감을 구입해 옷, 커튼, 침구커버로 리폼한 뒤 내다 파는 새 사업을 시작했다. 지디가 조사해보니, 이 마을 수급자의 약 81%가 저축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제인은 “집에 돈이 있으면 필요한 물건을 사는 데 돈을 써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며 “돈에 접근하기 어렵게 모바일뱅킹에서 돈을 찾아 은행에 넣고, 나중에 목표한 돈이 모이면 그때 인출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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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도주의 단체 기브다이렉틀리가 기본소득 파일럿 테스트를 하고 있는 케냐 서부의 한 마을에 사는 싱글맘 매릴린(왼쪽)이 지난 10월12일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미용실에서 “기본소득으로 내 미용실을 개업하는 게 꿈”이라고 말하며 웃고 있다. 케냐/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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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직업 남편, 전업주부 아내 관계에 변화가 생길까?

기본소득은 마을 구성원들의 가족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2010년 케냐 국립통계청은 기혼 여성 중 40%가 가정폭력을 경험했다고 발표했다. 그 정도로 가정 내 갈등과 성차별이 심각한 케냐에서 기본소득 실험 이후 유의미한 변화가 감지됐다. 우선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돈으로 인한 가정불화가 줄었다. 남편과 아내가 각자 기본소득을 받다 보니 아내들의 발언권도 커졌다. 마을 지도자 케네디(41)는 “전에는 아내 돈이라는 게 없었고, 돈을 어디에 쓸지 결정하는 사람은 나였다”며 “지금은 기본소득을 각자 쓰고, 공동으로 지출할 일이 있을 땐 아내와 상의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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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도주의 단체 기브다이렉틀리가 기본소득 파일럿 테스트를 하고 있는 케냐 서부의 한 마을의 리더 케네디(가운데)와 모니카(왼쪽) 부부가 지난 10월10일 집 앞에서 자녀들과 함께 서있다. 부부가 각자 기본소득을 받게 된 이후, 전업주부인 모니카한테도 ‘자기돈’이 생기면서 가정 내에서 모니카의 발언권이 커졌다고 부부는 말했다. 케냐/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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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녀 건강·진학률은 개선될까?

정비공이 된 데니스의 자녀 4명 중 큰아들은 발작 증세가 있다. 데니스가 기본소득으로 맨 처음 한 일은 아들을 위해 다달이 500케냐실링이 드는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한 것이다. 자녀 3명을 둔 마을 리더 케네디는 “애들이 학교에 갔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학교에 보내고 싶어도 돈이 없었지만, 이제 월말에 기본소득으로 수업료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학비는 학령별·학교별로 제각각인데, 중등학교는 1년에 1만2000케냐실링(약 13만5000원)에 시험 응시료와 보조교사 인건비 등 추가 비용이 든다.

5. 수급자 신체·정신 건강은 개선될까?

기본소득으로 비로소 하루 세끼 식사가 가능해진 주민이 많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신체와 정신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에 대한 답도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숯을 구워 파는 독신남 패트릭은 “기본소득 이후 규칙적(하루 세끼)이고 균형 잡힌 식사(옥수수 이외에 고기 등)를 하게 돼 건강해졌다”고 말했다. 패트릭은 1년 전만 해도 은둔자처럼 생활했으나 “자존감이 높아졌다”며 마음과 사회생활의 변화를 더 강조했다. 패트릭은 “이제 마을 사람들과 식당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면 나도 사 먹고, 맥주를 마시면 나도 사 마시며 마을 일을 얘기한다”며 “전에는 사람들과 말하는 게 두려웠는데, 돈이 생기면서 사회화가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케냐에서는 자기 돈으로 자기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 기본소득이 생긴 이후에야 마을 사람들과 한자리에 앉을 수 있고, 이웃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여주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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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도주의 단체 기브다이렉틀리가 기본소득 파일럿 테스트를 하고 있는 케냐 서부의 한 마을에 사는 서른 일곱살 아그리파가 지난 10월10일 기본소득으로 난생 처음 지은 자기 집 앞에 서있다. 케냐/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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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게 같은 액수를 주는 건 공평한가?

선진국 기준으로는 모두 가난하지만 이 마을에도 빈부 격차는 있다. 무너져내린 흙집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번듯한 시멘트집과 벽돌집도 더러 있다. 지디는 ‘모두에게 조건 없이’라는 기본소득 개념에 맞춰 성인 모두에게 같은 금액을 준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게 같은 돈을 나눠주는 게 공평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의외로 주민들은 하나같이 “마을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패트릭은 부자들이 기본소득 수급 대상에서 배제되면 “너 기본소득 받잖아. 그런데 왜 가난해? 나는 안 받아. 그런데 부자야!”라고 할 테지만 “모두 똑같이 받으니 누가 돈을 받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모두에게 같은 돈을 준 이후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돈을 요구하는 일도 줄었다”고 덧붙였다.

7. 현금을 주면 술·담배·도박에 쓰지 않을까?

지디 누리집에는 브루킹스연구소 로런스 챈디와 브리나 세이델의 흥미로운 추정치가 올라 있다. 연간 660억달러(약 73조9000억원)만 있으면 전세계 인구를 빈곤선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데, 역설적으로 세계에서 해외 원조에 투입하는 예산의 절반밖에 안 된다. 이는 지구촌 인도주의 지원 가운데 94%가 비현금성이고, 관료조직화된 원조 공급자들이 수혜자들한테 큰 도움이 안 되는 구호물품을 계획·구매·관리하는 행정비용 지출이 상당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부와 구호단체 및 후원자들이 효율적인 현금 대신 현물을 고집하는 배경에는 ‘수급자들이 돈을 술·담배·도박 등에 낭비한다’는 의구심도 자리잡고 있다. 제인은 자신이 속속들이 사정을 아는 이 작은 마을의 수급자 95명 가운데 술에 돈을 탕진하는 사람은 2명(2.1%)이라고 했다. 제인은 “두 사람은 육체노동자인데 그렇게 많은 돈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돈을 어디에 쓸지 우선순위를 모르고, 큰돈이 오히려 술을 마시는 계기가 된다”고 유추했다. 하지만 현금을 줬을 때 술로 날려버리는 2.1%는 현물 지원을 하려다 새는 50%에 비하면 그리 비효율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케냐/글·사진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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