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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금)

성희롱 당해도 쉬쉬… 서러운 특수고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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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설계사, 캐디 등 성희롱 사각지대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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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프랑 닮아…” 성적 농담 해도

계약해지될라 되레 회사 눈치 봐

용역·도급 계약에 개인사업자 분류

피해에도 사업주가 보호 의무 없어

‘직장 내 성희롱’ 인정 안돼 불합리

국내 생명보험회사의 보험 설계사 A(29)씨는 대학생 인턴부터 시작해 매니저 직함까지 달았지만 결국 사표를 냈다. 실적 압박도 컸으나 더 큰 문제는 꾸준히 계속된 팀장과 동료 매니저의 성희롱이었다. A씨는 “유부남인 팀장이 부인 젊었을 때와 닮았다며 밥을 먹자고 하거나, 회식 때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면서 “팀 분위기도 여성을 상대로 성적 농담을 거리낌없이 하는 편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A씨를 비롯한 동료들 모두 회사와 위촉 계약을 맺은 ‘개인 사업자’일 뿐 근로자가 아니라 회사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에 참는 수 밖에 없었다. A씨는 “분명히 직장 안 동료들 사이에서 생긴 일인데도 위촉 계약직이라 직장 내 성희롱이 아니라는 게 말이 되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샘에 이어 현대카드까지 ‘직장 내 성희롱’ 문제가 확산되고 있지만, A씨 같은 보험 설계사나 신용카드 모집인, 학습지 교사, 골프장 캐디 등 특수형태고용근로자(특수고용직)들은 피해를 당해도 최소한의 법적 보호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사용자와 근로계약이 아닌 용역ㆍ도급ㆍ위탁 계약을 맺는 특수고용직들이 근로기준법 등 각종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직장 내 성희롱 관련 법인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법’(남녀고용평등법) 적용대상도 아니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시 사업주의 피해자 보호조치 및 가해자 징계조치 및 성희롱 예방 교육 의무를 규정해 두고 있으나, 특수고용직들은 피해가 발생해도 사업주가 이들을 보호할 어떠한 의무도 없다. 이로 인해 현대카드는 성희롱 의혹이 불거지자 “당사자들이 위촉 계약사원이라 사내 규정을 적용하면 오히려 근로기준법 위반”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업계에 따르면 학습지 교사와 보험 설계사의 여성 비중은 각각 90%와 80%에 달하고, 신용카드 모집인과 골프장 캐디도 70%가 여성이다. 때문에 성희롱 범죄 대상이 되기 쉽지만 불안정한 신분 탓에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설명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대부분의 여성 설계사들이 기혼여성으로 생계를 책임지다 보니 보험사 간부나 동료 남성 설계사와의 사이에서 성희롱이 발생해도 일에 지장이 생길까 오히려 쉬쉬하는 편”이라고 전했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특수고용직들의 성희롱 진정조차 제대로 받아주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희 서울여성노동자회 상담팀장은 “지난해 고용부에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진정 건수가 552건인데, 이는 특수고용근로자들의 진정이 아예 제외된 수치”라면서 “특수고용근로자들이 회사에 사용ㆍ종속되는 경우가 많아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함에도 고용부는 이들이 근로자가 아니란 이유로 단 한 건의 진정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전했다. 특수고용직들은 성희롱 피해가 발생해도 민사 소송을 걸거나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는 길 밖에 없는 처지다.

때문에 특수고용직들의 근로기준법상 권리를 당장 일률 보장하긴 힘들더라도, 성희롱 피해로부터 보호하는 최소한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명숙 한국여성노동자회 정책국장은 “특수고용근로자들에게도 남녀고용평등법을 적용해 사업주가 이들에 대한 직장 내 성희롱을 금지하고 예방할 수 있도록 하는 의무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한국일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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