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구 행장은 야무진 사람이다. 차기 행장 후보 1순위인 수석부행장도 아니었지만 그는 2014년 말 예상을 깨고 행장에 취임해 많은 성과를 올렸다. 민영화라는 숙원을 풀었고 우리은행 주가를 2만원 가까이 끌어올려 직원들과 주주들의 주머니를 넉넉히 채워줬다. 경영실적도 좋아 올해는 3분기까지 이익이 이미 지난해 연간 실적을 넘어섰다. 그러나 우리은행도, 이광구 행장 자신도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우리은행은 황금시대를 눈앞에 두고 문 앞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광구 행장은 3년여 재임기간에 탁월한 경영성과를 올렸지만 늘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더욱이 최근 해명되긴 했지만 ‘최순실 사람’이라는 오해까지 샀다.
여기에다 승계 프로그램과 연계된 수석부행장 제도를 없애고 부문장 제도라는 것을 도입해 장기집권을 노린다는 오해, 감사라인 최측근 인사의 전횡까지 겹쳐 내부 불만이 쌓여갔고, 특혜채용 비리 투서사건으로 폭발했다. 금융권에서는 이번 투서사건을 주도한 인물로 전직 고위임원 K씨 등이 거명되고 있다. K씨 등이 폭로했다는 청탁자 리스트에는 전직 행장 P씨 등 여러 명의 유력인사가 등장한다.
아무리 한이 맺혔다 해도 수십 명의 청탁자 리스트 중 특정 은행 출신 위주로 골라 이를 국회의원 등에게 투서하는 행위는 함께 먹는 우물에 독을 타는 것과 다름없다.
돌이켜 보면 지난 1월 우리은행장 인사권을 쥔 5대 과점주주(한국투자증권 한화생명 키움증권 동양생명 IMM PE)들이 9년 만의 정권교체라는 큰 변화를 인지하고 박근혜정권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 이광구 행장 대신 내부의 다른 사람을 골랐다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광구 행장 입장에서도 민영화라는 큰 공을 세우는 등 잘 나갈 때 자신의 마지막 길을 미리 살펴봤다면 지금과 같은 불명예 퇴진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외이사들도, 이 행장 본인도 채 몇 달 앞도 내다보지 못했다.
이제 과제는 후임 행장을 뽑는 일이다. 누구를 뽑아야 할지는 의외로 분명하다. 역대 우리은행장에는 외부 출신 김진만 이덕훈 황영기 박해춘 4명과 자행(상업·한일은행) 출신 이종휘 이순우 이광구 3명이 있다. 외부 출신이 행장을 맡은 시절과 자행 출신이 은행을 끌어간 시절은 경영실적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2008년 이후 자행 출신 행장이 경영한 시절이 단연 앞선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자행 출신 행장이 선임될 수 있을까. 가능성은 높지 않다. 과거 김진만 행장 선임 당시 상업·한일은행이 서로 싸우다 결국 한미은행 출신 김진만에게 행장 자리가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우리은행은 특혜채용 비리를 저지른 ‘사고은행’이다. 주가조작 사고를 낸 BNK금융그룹 회장 인사가 어떻게 됐는지를 보면 안다.
한투증권 한화생명 등 5대 과점주주가 하나같이 당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금융사들이라는 점도 비관적 전망을 낳게 한다. 모르긴 해도 정치권이나 금융당국에서 작은 시그널만 줘도 이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뜻’을 받들 것이다.
황금시대의 문 앞까지 갔던 우리은행이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추락하는 것을 보는 건 슬픈 일이다. 우리은행은 지금 추락이냐, 극적 반등이냐는 기로에 서 있다. 우리은행 임직원도 노조도 그리고 5대 과점주주도 이를 명심해야 한다.
박종면 본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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