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기 셀트리온 대표는 전략기획 및 재무통으로 테마섹 등의 해외 투자유치를 주도하는 등 능력을 검증받았다. /사진=임성균 |
적잖은 386세대 직장인들의 삶이 그렇듯 김형기 셀트리온 대표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든 것은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였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던 그는 졸업과 동시에 당시 선망 받던 기업인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학군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대우차에서 본격적으로 경영기획업무를 맡았다. 회사에서 돈을 지원해주는 미국 MBA(경영대학원)과정에 뽑힐 정도로 핵심인재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1997년부터 대우차의 사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김 대표는 "워크아웃(재무구조개선작업) 상황이어서 기획실은 할일이 더 많아졌다"고 회상했다. 당시 김 대표는 수년간 거의 쉬는 날 없이 늦은 밤까지 일했다고 한다. 그는 "대기업을 관두고 벤처기업에 간다고 했을 때 주위의 반대가 심했다"면서도 "저녁 6시가 되면 퇴근하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며 고 말했다.
대우차 기획실에서 같이 일했던 서정진 회장을 비롯한 동료 5명과 셀트리온의 모태가 되는 '넥솔'(현 셀트리온홀딩스)이라는 회사를 차린 것이 2000년이다. 넥솔을 만들었지만 어떤 사업을 할지는 회사를 만들고 나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사업초기에는 IT(정보통신)나 BT(바이오) 등 21세기 유망사업을 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여러 분야를 스터디를 했다"며 "투자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안 해본일이 없다"고 말했다.
2002년 넥솔은 바이오사업에 집중하기로하고 셀트리온을 만든다. 문제는 바이오시밀러(바이오복제약)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업에 대한 확신이 있었지만 그들의 비전을 믿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회사 자금조달을 담당한 김 대표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었다. 국내에서 자금조달이 어려워지자 해외로 눈을 돌렸고, 테마섹, JP모건, 오릭스 등으로부터 1조원이 넘는 자금을 투자받았다.
그는 "수많은 기업을 만났고 수없이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지만 회사와 바이오시밀러 사업을 정리한 리포트를 들고 다니면서 투자자들을 설득했다"며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셀트리온이 4조원이 넘는 자금을 생산시설과 임상시험에 투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전략기획과 재무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2015년 셀트리온 공동 대표로 선임됐다. 그는 "대우차 시절보다 업무시간이 더 길어졌다"면서도 "셀트리온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다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많이 힘들진 않다"고 웃었다.
△1965년 출생 △1986년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96년 미국 미시건대 MBA △1986~2000 대우자동차 근무 △2000~2005년 넥솔(현 셀트리온홀딩스) 근무 △2005년 ~ 셀트리온
김명룡 기자 drag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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