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고 교원평가의 계절… 학생·학부모 익명에 숨어 인격모독·음담패설]
"평가기간 다가오는데…" 일부 학생 '협박'하기도
교육부서 금칙어 만들었지만 모두 걸러내지는 못해
지난 8일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사(35)는 '학생만족도 조사지'를 읽다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선생님께 바라는 점'을 적을 수 있는 칸에 몇몇 학생들이 막말을 적었기 때문이다. 이 교사는 "미숙한 학생들이라 이해하려고 하지만, 나름 성심껏 가르친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의 상처가 크다"고 했다.
지난 9월부터 전국 초·중·고 교원을 대상으로 한 '교원능력개발평가'가 진행 중이다. 1년에 한 번 하는 이 평가에 학생·학부모가 익명으로 교사에 대한 '만족도'를 평가하는 항목이 있다. 일부가 인격 모독적인 말과 욕설을 하면서 '교권 침해'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전의 한 중학교 교사 김모(34)씨는 지난해 교원평가에서 "다리가 굵으니 치마를 안 입으셨으면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료 교사 중엔 '가슴이 크다. 하고 싶다'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음담패설을 받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김씨는 "평가를 앞두고 아이들에게 '선생님도 사람이다. 너희 생활기록부에 선생님이 감정적인 평가를 적는다면 어떨지 미리 생각해보라'고 말했지만, 올해 결과를 열람하기 겁난다"고 했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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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학부모 만족도 조사'는 교사의 학습 지도와 생활 지도에 대해 '그렇다' '매우 그렇다' 등을 선택하는 '5점 척도' 문항들과 서술형 문항 2개에 답하게 돼 있다. 서술형 문항엔 학생과 학부모가 '선생님의 좋은 점' '선생님께 바라는 점'을 300자 이내로 자유롭게 적을 수 있다. '학생·학부모 참여 통합 서비스' 홈페이지에 접속해 이름, 본인 확인 번호 등을 입력하고 평가한다. 부족한 점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교원의 전문성을 키우겠다는 취지지만, 비방과 욕설, 음담패설 등을 적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조사를 빌미로 교사에게 '협박성' 말을 하는 학생들도 있다. '5점 척도' 문항에서 2.5점 이하의 평점을 받으면 별도의 '능력향상연수'를 받아야 한다. 서울의 한 중학교 교사는 최근 학생에게 "선생님 잘 좀 하세요. 평가 기간 다가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제자에게 협박당한다는 느낌이 들면 수업할 맛이 안 난다"고 했다.
악의적 비방은 학부모들도 예외가 아니다. 대구의 한 고등학교 교사(44)는 '학부모 대상 만족도 조사'에서 "선생님답게 생기지 않았다. 말을 상냥하게 하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교사는 "얼굴 볼 일도 없고 자녀나 주변 학부모들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로 적는 평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아이들에게 엄하게 대하면 그대로 나쁜 평가로 돌아온 다. 무관심한 교사들이 오히려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한국교총 관계자는 "특히 학부모 평가에 대해 동의하지 못한다는 교사들이 많다"며 "수업에 최소 2회 이상 참석해 본 학부모를 대상으로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학교 현장에서는 학생생활지도 담당 보직을 기피하는 일도 벌어진다. 아이들을 엄하게 야단치고 학칙대로 엄격하게 다루는 교사들이 매년 낮은 업무평가 점수와 악의적 서술 평가를 받는다. 아예 '학생만족도 조사' 결과를 제대로 열람하지 않는 교사들이 늘면서 폐지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런 문제가 커지자 교육부는 욕설이나 비속어들을 '금칙어'로 등록해 '학생만족도 조사' 때 못 쓰도록 하고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등록된 금칙어만 수백 개가 넘지만, 현실적으로 모두 걸러낼 수는 없다"고 했다. 한국교총 관계자는 "교원평가의 취지와 관계없는 인격 모독, 음담패설은 원천적으로 차단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손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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