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6 (수)

[오래전 '이날']10월20일 어린이를 죽이지 말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오래전‘이날’]은 1957년부터 2007년까지 매 10년마다의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 합니다.

경향신문

■1967년 10월20일 어린이를 죽이지 말라

“귀여웠던 그 모습, 범인들은 자수하라, 비명에 간 유괴 살인 희생자 근하군만이 아닌 숱한 얼굴들”

1967년 10월 20일자 경향신문을 펼치는 순간 1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문구 하나하나에서 절절함이 묻어나옵니다. 오래된 흑백 사진임에도 어린이들의 표정은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대체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경향신문은 분노의 1면을 작심했을까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부산 어린이 김근하군의 유괴살인사건입니다. 김군은 1967년 10월 17일 밤 10시10분경 괴한에 납치됐습니다. 나일론 끈에 목이 졸리고 과도에 가슴을 찔린 채 숨진 김군의 시신은 부산 대신동 한 제빙업체 앞 골목에서 링거병 상자 속에 담긴 채 발견됐습니다. 잔인한 범행 수법으로 당시 경찰은 원한에 의한 유괴 살인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잔인한 사건이 이번만이 아니라는 데 있었습니다.

경향신문

“귀여운 어린이의 목숨을 살인마에 앗긴 수많은 부모들의 슬픔은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여기 비명에 간 수많은 어린이들 중 몇 가지만 추려 극악범죄를 막는 하나의 경종이 되고자 한다.”

1956년 진주의 모 여고에서 퇴학당한 임모양(18)과 그의 어머니 김모 여인(39)이 퇴학 처분에 격분, 해당 여고 교감 조모씨의 일곱 살 셋째아들을 유괴해 오른쪽 귀밑 동맥을 찔러 살해했다.

1961년 절도전과자인 박모씨가 서울 신당동 김모씨의 4살 아들을 과자를 사준다고 꾀어 대현산 저수지로 데려가 입과 코를 막아 살해했다. 박씨는 아이의 코트와 바지를 벗겨서 가져갔다.

1963년에는 약방에 취직했다가 해고된 데에 앙심을 품은 27세 이모씨가 약방 주인 김씨의 다섯 살 아들을 집 앞서 유괴해 교살했다. 시신은 사과궤짝에 넣은 뒤 돌을 달아 한강에 버렸다.

1966년에는 서울 남산 골짜기에서 김모씨의 6살짜리 셋째 딸이 피살된 채 발견됐다. 경찰은 사건 발생 17일 만에 13살 조모양을 체포했다. 조양은 머리카락을 팔면 돈이 된다는 말을 듣고 집 앞에서 노는 김씨의 딸을 유괴한 뒤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이때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겁을 먹고 돌멩이로 머리를 때린 뒤 가위로 살해했다.

1965년 부안에서는 11살 박모군이 목숨을 잃었다. 동네 무허가 이발사 김모군이 박군을 동네 뒤 청승산으로 유인해 괭이로 찍고 돌로 쳐서 살해했다. 강간 및 절도 전과자인 김군은 동네 처녀와 연애하는 것을 박군이 알고 소문을 퍼뜨린 데 격분해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1967년 순천에서 정모군은 한 병원장의 일곱 살 아들을 유괴해 그날로 살해한 뒤 암매장했다. 이후 병원장에게 여섯 차례에 걸쳐 돈을 가져오라는 협박을 했고 30만원을 챙겼다. 범인은 서울의 한 병원에서 얼굴의 곰보 자국 성형시술을 받던 중 체포됐다.

1967년 7월 진주에서는 여객회사를 운영하는 박모씨의 아들을 유괴한 괴한 3인이 검거됐다. 경찰은 10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수배한 끝에 검거에 성공했다. 박씨가 운영하는 회사의 종업원이었던 그들은 월급이 적다는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유괴한 박씨의 아들은 남강백사장에 데려가 수면제를 탄 사이다를 먹인 뒤 모래 속에 파묻었다고 털어놨다.

경향신문

읽은 것조차 고통스러운 과거 사건을 일일이 나열하면서 경향신문은 국민적 관심을 호소했습니다.

“범인은 자수하라. 어린이의 그 맑은 눈, 귀여운 입, 부드러운 볼, 그리고 조막손. 마지막 순간까지 울부짖었을 근하군의 모습이 생각난다면 너는 하루빨리 자수해야한다.”

김근하군 사건의 진범은 잡혔을까요? 관련 기사를 찾으면서 요즘말로 고구마 10개를 물 한 모금 없이 먹은 심정이 됐습니다. 1982년 10월 18일자 경향신문에는 김군 유괴살해사건의 공소시효가 10월 17일로 끝나 진범이 나타나도 형사 처분을 할 수 없다는 보도가 실렸습니다. “이 사건은 범행 수법의 엽기성, 대담성, 특이성 등으로 온 국민의 분노를 샀으나 당시 수사진의 육감에 의한 무리한 자백 강요로 무고한 시민들이 숱하게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는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1968년 5월 경찰은 김군의 외삼촌 최모씨를 포함한 범인 일당을 검거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는 허위 투서에서 비롯된 검거에 고문에 의한 강제 자백임이 알려져 사회에 또 한 번 충격을 주었습니다.

김군 살해사건의 범인으로 구속돼 1심에서 유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2심에서 혐의를 벗은 김모씨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8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그의 사연은 연극으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잔인했던 현대사의 비극 한 편을 본 듯한 오래전 이날이었습니다.

<장회정 기자 longcut@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