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28 (토)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취기의 틈새에서 농축된 낮과 밤…취중의 순진하고 은밀했던 자백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외할아버지는 무역업을 하셨다. 내가 여덟 살 되던 해 돌아가시기 전까지, 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신기한 물건들을 사오셨다. 자개 오르골, 유리를 불어 만든 새, 정교하고 으스스한 일본 장식 인형. 그런 것들 사이엔 꼭 술이 한두 병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브랜디가 뭐고 럼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어렸으니까. 기억 속엔 그저 풍경만이 선명하다.

거실 안쪽, 오후 한때만 드물게 햇빛이 비쳐드는 나무 벽장. 술병들은 언제나 한결같은 포즈로 열병해 있었다.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않아 그것들은 소모품이라기보다 육중한 가구의 일부였다. 녹색, 검은색, 호박색, 황금색, 금박으로 새긴 외국어들. 어떤 병은 도자기였고, 어떤 병은 섬세하게 조각한 디캔터였다. 어떤 병들은 뚜껑 대신 모자나 물병을 쓰고 있었다. 내부가 보이지 않는 보틀은 시시했다. 투명한 굴곡마다 광채가 고였다 흩어지는 크리스털 표면도 좋았지만, 내가 열정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은 어두운 색의 간유리 술병이었다. 술빛을 감춘 채, 검고 흐릿한 실루엣으로 그 수심만을 알려주는 유리병들은 유령을 은닉한 성채 같았다. 외할머니 몰래 무거운 병을 들고 흔들어 본 적도 많았다. 두꺼운 유리 너머 찰랑거리는 액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트라이앵글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악기와 술병의 음성이 어딘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17년 경력의 베테랑 술꾼이 되었다. 브랜디가 어떤 맛이고 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잘 알고 있다. 술을 만드는 회사에서도 일해 봤다. 그 회사의 맥주 양조장에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남겼다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와인에는 지혜가 있고 맥주에는 자유가 있다. 그리고 물에는 박테리아가 있다.” 나는 이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술에 지혜 따위는 없고, 자유 같은 건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전두엽에 알코올이 미치는 변화’까지 운운하지 않아도 술은 사람을 우매하게 만든다. 술은 인류의 이상한 발명품이다. ‘올해의 실수’라 부를 만한 일을 저질렀던 때마다 혈관 속 알코올 농도가 얼마쯤이었는지 떠올려 보라.

경향신문

그런 자괴감이 들 때마다 떠올리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이야기가 있다. “그 좋은 시절을 멀쩡한 정신으로 기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별로 기억할 만한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술을 좋아하는 건 피츠제럴드의 이야기와 같은 이유에서다. 도저히 봉합되지 않는 취기의 틈새에서 몇 해의 시간이 농축된 낮과 밤이 있었다. 시계와 사람의 시간은 다르다. 친구들의 빛나는 찰나, 미친 듯 웃어 젖힌 농담들, 가장 진솔할 수 있었던-혹은 진솔함을 매력적으로 가장했던-새벽의 대화들, 너무 순진한 자백이라 오히려 부끄럽고 은밀했던 이야기들이 술병과 술병 사이에 있었다. 그건 진실일 수도, 알코올이 부른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진위 여부에 큰 관심이 없다. 기쁨의 근거는 자기 자신일 뿐, 반짝이다가 사라진 후 다시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10년어치의 실수를 서로 알고 있는 술친구와 바에 앉아 벽장을 본다. 외할아버지의 술장과 달리 이곳의 술병들은 자주 움직인다. 창틈으로 들어오는 가을바람에, 알코올 도수가 높고 달콤하고 쌉쌀한 클래식 칵테일 올드패션드(Old Fashioned)를 주문한다. 버번위스키의 달콤한 바닐라향, 오렌지향과 체리향이 입안 가득 섞인다. 친구가 느슨한 웃음을 터뜨린다. 밤이 아직도 길다.

<정미환 오디너리 매거진 부편집장>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