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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 (월)

[북 리뷰] 기구하고 기구했던 그녀, 루시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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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 ‘루시골트 이야기’

한국일보

군더더기 없는 묘사, 정밀한 인물상, 예리하면서도 부드러운 시선… 윌리엄 트레버의 말년 대표작 '루시골트 이야기'는 20세기 영미소설의 정석을 보여준다. 한겨레출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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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골트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 지음ㆍ정영목 옮김

한겨레출판 발행ㆍ388쪽ㆍ1만4,000원

윌리엄 트레버의 국내 입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무 늦게 당도한 비운의 작가’ 쯤 되겠다. 아일랜드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 영국으로 이주했고 1964년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해 수백 편의 단편소설, 18권의 장편소설을 썼다.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 ‘작가들의 작가’란 판에 박힌 수식어보다 눈 여겨 볼 지점은 근대 소설 양식의 정석 같은 스타일이다. 독특한 설정도 갈등도 인물도 없는 그의 소설은 줄거리가 단순하고, 묘사는 건조하다. 요컨대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상업영화에서 얻는 재미 같은 걸 추구해서는 안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트레버 소설의 특징을 ‘군더더기 없는 정화하고 생생한 묘사와 설정된 인물상의 흔들림 없는 정밀함, 칼 같이 예리하지만 동시에 불가사의한 부드러움을 지닌 소설적 시선’이라고 정리했다는데, 대단히 적확하다. 집중력과 인내심을 갖고 문장을 곱씹다 보면 환희가 밀려온다. 매끈하고 밀도 높은 문장을 작가의 제일 덕목으로 치는 국내 출판계에 그가 본격 소개된 건 의외로 재작년부터였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2002년 발표된 ‘루시 골트 이야기’는 지난해 출간된 ‘여름의 끝’ 이후 두 번째로 번역된 장편소설이다. 복잡다단한 근대사를 통과하며 위대한 작가가 여럿 탄생한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운명과 시간이 한 개인의 삶에 조용히 작용하는 방식’(번역가 정영목)을 그려낸다.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한창인 1921년. 코크 카운티의 라하단 저택에 살고 있는 에버라트 골트 대위 가족은 군인이자 잉글랜드 출신이라는 이유로 공격 대상이 된다. 어느 날 밤 골트 대위는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려는 한 청년의 어깨에 총상을 입히고, 청년 가족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지만 사과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위와 아내 헬로이즈는 딸 루시를 위해서라도 아일랜드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루시는 숲 속에 숨으면 부모님이 이사를 포기하리라는 생각에 몰래 집을 나가고, 헬로이즈의 옷가지가 바다에서 발견되는 우연들이 겹치면서 아이는 익사했다고 여겨진다. 골트 부부는 딸이 죽은 줄 알고 아일랜드를 떠난다.

아일랜드 역사를 모른 채 첫 장을 펼친 한국 독자들은 이 부분에서 어리둥절해질 터다. 그렇다면 제 집에 불을 지를 청년을 어떻게 대해야 했을까. 맨 뒷부분 번역가의 말을 펼쳐보자. 원래 아일랜드는 가톨릭이 지배적이었지만 종주국에 가까웠던 영국이 신교로 전환하면서 아일랜드의 구교도 박해가 시작됐다. 청교도 혁명 때 아일랜드인 토지를 몰수해 잉글랜드인에게 줘버렸는데, 가톨릭 소작농 대(對) 신교도 지주라는 대결 관계가 성립됐고, 1801년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합병 후 전개된 독립운동은 반지주, 반신교도 운동을 포괄하게 된다. 1919년 독립전쟁은 1921년 12월 자치를 인정받는 것으로 끝난다. 소설은 신교도 지주들이 고향을 등진 시점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루시 골트는 물론 살아있다. 부상을 입은 채 시녀 패디 린던의 오두막에서 발견된 루시는 부모를 괴롭게 했다는 후회 속에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다. 어머니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오래된 소설을 읽으며 꿀벌을 키우면서, 자신을 발견해 키워준 헨리 부부와 ‘그저 자신이 받은 (골트 부부의) 환대에 대한 값’으로 정성을 다 바치는 변호사 설리번과 신교도 신부 크로스비 등 소수의 사람들과만 소통하면서.

골트 대위에게 어깨 총상을 당했던 청년 호라한은 ‘혁명 조직에 속한 적이 없었지만’ 봉기대원으로 예우 받기 시작한다. ‘그날 일’에 늘 자부심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이 예우를 거절하지 못했던 그는 불타는 라하단 저택과 8살짜리 루시가 어른거리는 꿈을 꾸고 난 다음 철도 잡역부 일을 그만두고 군에 입대했다.

루시는 레이프란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청년은 ‘골트 집안의 이야기’가 “환상들을 박살 낸 지옥”을 겪은 자신의 유년시절 상실감을 꼭 닮아서, 그녀를 사랑했다. 루시는 부모에게 용서받을 때까지 자신의 인생에서 행복을 보류해야 한다며 남자의 청혼을 거절하고 10여 년에 걸친 구애는 레이프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서 끝난다.

이탈리아, 프랑스를 떠돌다 아내 헬로이즈를 잃고 다시 골트 대위는 라하단 저택으로 돌아오고 이곳을 떠날 때 아내 나이의, 아내와 꼭 닮은 루시와 만난다. 물론 이들은 계속 불행하다. 죽은 어머니에게서 끝끝내 용서 받지 못할 루시는 계속 지난 날을 자책하고, 아버지는 라하단으로 편지를 쓰고도 아내에게 더 큰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편지를 매번 불 구덩이에 넣어 태워버렸던, 그래서 끝내 자신들의 주소를 헨리 부부가 찾지 못하도록 했던 지난 날을 후회하면서.

‘왜 아직 바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실수와 어리석음을 바로 잡지 않고 놔두어야 할까? 간절한 호소들이 있었고,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확신이 있었고, 모든 것이, 갈망, 간청이 너무 자주 되풀이 되었다.’

스스로를 불행에 빠뜨리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구원을 얻은 루시의 이야기는 민담으로, 전설로, 신화로 바뀌어가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작가는 사건 그 자체보다 사건이 시간의 기적을 통해 이야기가 되는 과정을 냉정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읽는 내내 원서를 보고 싶다는 욕망이 이는 작품이다. 한 개인의 일생이 단편 소설의 문장 밀도로 400쪽 내내 이어지는 소설을 덮으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작가들의 작가.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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