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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소년중앙] 강낭콩 관찰, 언니와의 싸움... 사소한 일상이 그림책으로 변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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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세 명의 학생기자를 소개합니다. 작가가 꿈이라 책 만드는 과정에 관심이 무척 많은 전지우(서울 영문초 5) 학생.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며 역시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인 한서연(서울 서정초 5) 학생, 그리고 책과 미술, 음악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은 김재인(서울 창경초 5) 학생입니다. 이 세 학생의 공통점은 바로 책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죠. 또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도 좋아하고요. 공통점이 많은 이 세 명의 학생이 9월 7일 ‘SI 그림책학교(서울 마포구)’를 찾았습니다. 그림책 제작과정을 살펴보고 나만의 그림책을 직접 만들어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틀 동안, 총 7시간의 작업 과정을 거쳐 손수 만든 세 명 학생의 그림책은 과연 어떤 내용일까요?

글=이세라?한은정 기자 slwitch@joongang.co.kr

사진=임익순?송상섭(오픈 스튜디오)

중앙일보

SI 그림책학교에서 나만의 그림책을 만들어 본 학생기자들이 완성된 그림책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전지우, 한서연, 김재인 학생기자와 그림책 만들기를 도와준 조선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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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주제 정하기

“SI 그림책학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소중 학생기자들을 반긴 것은 그림책작가이자 SI 그림책학교의 조선경 교수입니다. 인사를 나누고 그림책 작가가 하는 일에 대해 간단히 질문을 마친 학생들은 조 대표의 안내에 따라 본격적으로 그림책 만들기 작업에 들어갔죠.

가장 먼저 할 일은 어떤 책을 만들지 주제를 정하는 겁니다. 조 교수는 “스스로 경험한 일에서 주제를 가져오자”고 말했습니다.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는 잘 만들기가 어렵지만, 엄마에게 혼이 나서 억울했던 일 또는 동생이랑 멀리 가서 군것질하고 온 일처럼 직접 경험한 일을 떠올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일들이라 힘들게 이야기의 짜임새를 맞출 필요도 없죠.

학생들은 각자 종이에 세 개의 아이디어를 적었습니다.

지우 ①하얀 거짓말은 좋은 걸까? ②산타할아버지가 날 배신했어. ③눈이 오지 않는 날.

재인 ①고정관념과 벽. ②항상 언니·오빠와 싸우지만, 꼭 나에게 필요한 존재. ③아재 개그.

서연 ①나의 진짜 꿈에 대해 생각한 내용. ②내가 키운 강낭콩이 꼬투리를 터뜨리기 얼마 전에 시든 내용. ③공부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 내용.

조 교수는 지우의 아이디어 중에서 ③눈이 오지 않는 날을 골랐습니다. “제목만 봐도 진짜 있었던 일 같네요. 단순하지만, 주제를 잘 보여주는 제목이죠.”

자신의 차례가 오자 재인이는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아이디어를 밀기 위해 적극적으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아재 개그도 실제 겪은 일이에요. 아빠가 매일 아재 개그를 하시거든요.”

하지만 아쉽게도 ②번이 뽑혔습니다. 조 교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아재 개그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 순 있어요. 하지만 형제간의 이야기처럼 내가 실제 겪은 일은 인과관계(어떤 행위와 그 후에 발생한 사실 사이에,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는 일)가 이미 잘 짜여 있죠. 없던 일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좋은 이야기를 만들 가능성이 많아요.”

이쯤 되니 감이 오지 않나요? 네, 조 교수는 서연이 아이디어 중에서도 ②번을 골랐습니다. 그런데 어째 학생들의 표정이 신통치 않습니다.

“세 개 중에 한 개를 고르면, 보통 자기가 가장 하기 싫은 게 뽑히더라고요(웃음).” 조 교수의 말에 학생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 틈을 타 재인이가 다시 설득에 나서봅니다. “그런데요, 지금 고른 이야기는 이미 책에 많이 나왔잖아요?” 하지만 별 소득은 없습니다. “상관없어요. 아마 책으로 나오지 않은 이야기를 찾는 게 더 어려울 걸요(웃음). 그리고 이 내용을 그대로 책으로 만들진 않을 거예요.”

2단계. 이야기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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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조선경 교수와 학생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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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평범한(?) 일들이 어떻게 책속의 그럴듯한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걸까요? 이 작업을 위해 조 교수는 최종으로 고른 세 개의 주제 속에 나오는 캐릭터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재인: 나와 언니와 오빠

지우: 나와 눈

서연: 나와 강낭콩

“자, 이제부터 등장인물들을 여러 가지 캐릭터로 바꿔볼 거예요. 예를 들면 ‘나’ 대신, 내가 그리고 싶은 ‘무엇’인가를 넣는 거죠." 조 교수의 말에 서연이가 되묻습니다. “그럼 토끼가 당근을 키울 수도 있나요?”

“그럼요. 다른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재인이의 경우 언니 대신에, 나와 매일 싸우는 강아지 캐릭터가 나올 수도 있죠. 지우의 경우 나 대신에 물건이 나올 수도 있어요. 예를 들면 살아 있는 망치가 있는데, 매일 눈이 오길 기다리는 거죠. 눈 대신에 저녁이 오길 기다릴 수도 있고, 산타를 기다릴 수도 있죠.”

고민의 고민 끝에, 학생들이 바꾼 캐릭터는 다음과 같습니다. 재인이는 ‘나와 언니와 오빠’를 ‘동생 청둥오리와 형 청둥오리’로 바꿨죠. 간결한 이야기 구조를 위해 캐릭터를 두 명으로만 정한 겁니다. 지우는 ‘나와 눈’을 ‘솜인형과 비’로, 서연이는 ‘나와 강낭콩’을 ‘파랑새와 사과나무’로 정했습니다.

그 다음 새로 정한 주인공 캐릭터에 맞게 이야기 형태를 다듬었습니다. 지우가 만들 책은 비를 기다리는 솜 인형의 이야기예요. 오랫동안 기다린 비가 드디어 내리기 시작했는데,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비를 맞으면 솜인형은 무거워져서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요. 서연이의 책은 파랑새가 키운 사과나무 이야기입니다. 파랑새가 먹은 사과의 씨가 땅에 떨어지고, 그래서 그 씨에서 싹이 터 사과나무가 자란다는 내용이죠. 재인이의 책에는 매일 싸우기만 하며 사이가 좋지 않은 형제 청둥오리가 등장합니다. 어느 날, 동생 오리가 위험에 처하게 되고, 형이 동생을 구해준다는 이야기죠.

3단계. 그림 그리기

드디어 캐릭터를 그림으로 그리는 시간입니다. 준비물은 간단합니다. A4용지 여러 장과 4B연필·지우개·볼펜이 전부입니다. 조 교수는 학생들에게 각자 정한 캐릭터의 실제 사진을 검색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 사진을 찾은 다음, 그 사진을 보고 따라 그리는 거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만 그리면, 그림의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실제 모습과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릴 수도 있죠. 예를 들면 ‘청둥오리’라고 캐릭터를 정해놓고 도널드 덕과 비슷한 오리를 그리는 식입니다.

“작가들도 많이 하는 실수인데, 내가 그리는 대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고 그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림이 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유명한 만화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십상이죠. 실제 모습을 자세히 살피며 그려본 다음에야 자신만의 캐릭터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어요.”

캐릭터 그림이 어느 정도 완성되자, 학생들에게는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나흘 뒤에 다시 만날 때까지 5장의 그림을 그려오는 거죠. 또 그림에 맞는 글도 써오기로 했습니다. 글은 페이지마다 1~2줄 정도로 짧게 쓰면 돼 그림보다 부담이 덜합니다. 이렇게 완성한 5장의 그림과 글이 곧 그림책의 원화가 될 계획이죠. 학생들은 숙제 내용을 몇 번씩이나 확인한 후에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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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 교수가 그림책의 작업 방법을 학생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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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단계. 책 만들기

9월 11일 오후 1시. 세 학생은 주말 동안 열심히 그린 그림을 들고 다시 SI 그림책학교에 모였습니다. 조 교수는 먼저 ‘인디자인’이라는 편집디자인 프로그램을 활용해 책을 디자인하는 과정을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프로그램을 통해 그림의 위치를 조절하고 글씨를 얹는 작업입니다. 조 교수는 "이 같은 디자인 과정을 거친 후 인쇄와 제본을 하면 한 권의 그림책이 완성된다"고 설명했죠. 하지만 이런 전문적인 작업을 학생들이 직접 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디자인은 물론이고 인쇄나 제본에 대해서도 공부가 필요해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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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자인'이라는 편집디자인 프로그램을 활용해 표지를 디자인하고 있는 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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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조 대표는 “단순한 방법으로 그림책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책의 표지만 인쇄하고, 내지는 원화를 페이지 순서에 맞게 앞뒤로 붙여 책을 만드는 겁니다. 우선 학생들은 각자의 그림 위에 작성해 온 글을 직접 쓰기로 했습니다. 이때 그림과 어울리는 적절한 위치에 글을 적는 것이 중요하죠. 다음은 페이지 순서에 맞게 원화를 서로 붙여줍니다. 반으로 접은 5개의 그림을 페이지 순서대로 겹쳐준 다음, 그림이 없는 부분의 겹친 면을 풀로 잘 붙이면 됩니다. 그 사이 조 교수가 세 개의 그림을 디자인해 표지를 인쇄해왔습니다. 자, 이제 표지를 붙일 차례네요. 표지 역시 반으로 접어 그림책 내지 바깥에 붙여주니, 제법 근사한 그림책이 완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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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작업을 거친 표지를 인쇄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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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재단기에 책을 넣고 들쑥날쑥한 끝부분을 깨끗이 잘라내면 그림책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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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마지막 작업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종이 재단기에 책을 넣고 들쑥날쑥한 책 끝 부분을 깨끗히 잘라냅니다. “덜컹” 소리와 함께 책 표면이 깔끔해졌죠. 그런데 책을 받아든 서연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립니다. 책의 가장 윗부분에 글을 썼는데, 재단을 하며 글씨가 조금씩 잘린 겁니다. 조 교수는 “끝 부분이 잘릴 걸 예상하고 어느 정도 여백을 주고 디자인해야 한다”고 조언했죠.

이처럼 실수도 있고 부족한 점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한 책을 받아든 학생들은 연신 감탄을 합니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책이 완성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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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소개와 취재 후기
자신이 만든 그림책을 학생들이 직접 소개했습니다. 또 그림책 만들기 과정을 겪어본 소감도 함께 소개합니다.

『난 네 형이니까』

글·그림 김재인, 5쪽, 썸북스.

음악을 좋아하는 동생 청둥오리와 음악을 싫어하는 청둥오리 형의 이야기다. 평소 많이 싸우는 둘이지만, 동생 청둥오리가 위험에 처하자 그 누구보다 먼저 형 청둥오리가 동생을 구해준다. 나와 언니의 실제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 세상의 모든 자매, 형제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내용이다.

"그림 5장에 내용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글로 내용을 전달하려고 한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어. 또 책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인줄 알았는데 직접 해 보니 여러 가지의 중요한 과정을 거쳐 어렵게 만들어지는 것을 알게 됐어. 그중에서도 책의 울퉁불퉁한 가장자리를 깨끗하게 잘라내는 재단기가 가장 신기했어.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심생각’, 즉 ‘저자가 책에서 전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가’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 _재인

『비를 맞으면』

글·그림 전지우, 5쪽, 썸북스.

주인공은 강아지 모양의 솜 인형이다. 솜 인형의 소원은 바로 비를 흠뻑 맞는 것.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기원하던 솜 인형은 드디어 비를 만나고, 밖으로 나가 솜이 푹 젖을 때까지 비를 맞는다. 비를 맞은 인형은 자신의 몸이 솜이 아닌 구름으로 채워졌다는 걸 알게 된다. 어느새 땅에 머무는 구름이 된 인형은 자신처럼 비를 기다리는 다른 솜 인형에게 비를 선물하러 간다.

"난 장래희망이 작가라서 이번 취재가 굉장히 기대됐어. 그런데 막상 작업을 해보니 쉽지 않았지. 그림을 더 다양하게 표현하지 못한 점과 글씨를 깔끔하게 쓰지 못한 점이 후회가 돼. 다시 만들 기회가 있다면 글씨를 다양하게 배치하고, 채색도 해보고 싶어. 무엇보다 책 만드는 과정을 확실하게 알게 돼 좋았어. 작가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지." _지우

『작은 새와 사과나무』

글·그림 한서연, 5쪽, 썸북스.

직접 키웠던 강낭콩이 꼬투리가 터지기 얼마 전에 시들어버린 일을 그림책으로 만들었다. 그림책에서는 나를 새로, 강낭콩을 사과나무로 표현했다. 강낭콩이 시들었을 때의 속상한 감정을 그림책에 모두 담았다. 책 속에 등장하는 작은 사과나무는 희망을 뜻한다.

"완성된 그림책을 보니 뿌듯했고 해냈다는 느낌이 들었지. 무엇보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책이라는 것이 좋았어. 하지만 진짜 그림책 작가들처럼 많은 시간과 기술을 들인 게 아니어서 아쉽기도 했어. 난 평소에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친구들이 ‘책벌레’라고 부르는데 정작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던 것 같아. 이번 취재를 통해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작가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 _서연









조선경

그림책작가. 그림책출판사 썸북스의 대표이자 SI 그림책학교 교수다.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 동대학원 초현실주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SVA에서 Illustration as Visual essay로 MFA를 받았다. 94년 귀국해 일러스트레이션과 그림책 작업을 병행했다. 『마고할미』 『지하정원』 『파랑새』 『랄라라』 등의 그림책을 출간했다. 패션디자이너 질 샌더와 의상 협업한 적 있으며, 영국 V&A와 디자이너 폴 스미스의 런던 매장에서 작가의 그림책이 전시?판매되고 있다.

SI 그림책학교

2003년 7월 개교한 그림책전문 학교다.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 그림책을 연구하며 학생들이 국제적인 작가로 성장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 볼로냐 어린이책 페스티벌에 전용 부스를 마련하고 졸업생들의 작업성과를 전시하고 있다. 또 프랑스의 메모(MEMO), 이탈리아의 꼬라이니(corraini), 스위스의 니브스 북(nieves book), 인도의 타라 북스(tara books) 등 세계적인 그림책출판사와 지속적인 출판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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