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7 (일)

[도진기 변호사의 판결의 재구성]‘사라’를 위한 재심청구는 곤란하지만, 재출간은 어떨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광마’를 위하여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예술성에 의한 성적 자극 완화가 크지 않다”며 음란 판결. 일본선 10만부 팔린 책…주관적 판단인 ‘음란’을 이유로 형사처벌은 곤란.

형사소송 원칙인 ‘피고인의 이익을 의심’하지 않는 유죄 판정 이해 안돼. 이제 ‘음란의 잣대’도 바뀌었으니, 사회 후진성 벗기 위한 노력 필요할 것.


경향신문

영화 <꽃과 뱀>은 SM(사디즘과 마조히즘) 에로티시즘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여러 후속작을 낳았고, 우리나라에도 팬이 많다. 원작자인 단 오니로쿠(團鬼六)는 일본 SM 관능소설의 선구자로 추앙받았고,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제정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인물이 있을까. 먼저 마광수 교수가 떠오른다. 그런데 인생길은 판이하다. 28세에 대학교수가 되고 일찍이 천재라 불렸던 그는 소설을 냈다가 구속되어 전과자가 되고 변태로 조롱받았다. <즐거운 사라> 사건이다.

마광수 교수는 얼마 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안타깝다. 스스로 목숨을 거둔 인과를 보면 그때 입은 필화가 영향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다. 그 판결은 과연 적절했을까.

경향신문

당시 재판에서 음란성 기준은 이랬다.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건전한 사회통념에 비추어서 판단하되, 예술성과 사상성으로 음란성은 완화될 수 있다.” <즐거운 사라>는 음란문서에 해당된다고 판단했다. “미대생인 사라가 성에 대한 학습요구의 실천이라는 이름하에 벌이는 자유분방하고 괴벽스러운 섹스행각 묘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 그러한 묘사부분이 양적, 질적으로 문서의 중추를 차지하고”, “구성이나 전개에 있어서도 문예성, 예술성, 사상성 등에 의한 성적 자극완화의 정도가 크지 아니하며, 주로 독자의 호색적 흥미를 돋우는 것으로밖에 인정되지 않아”서라는 이유였다.

작가 장정일도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음란성 논란으로 구속된 적이 있다. 그를 유죄로 확정한 대법원 판결문은, “문학성 내지 예술성과 음란성은 차원을 달리하는 관념이므로 어느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문학성 내지 예술성이 있다고 하여 그 작품의 음란성이 당연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고, 다만 그 작품의 문학적·예술적 가치, 주제와 성적 표현의 관련성 정도 등에 따라서는 그 음란성이 완화되어 결국은 형법이 처벌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 논리는 애매하다. 앞 문장에서 문학성이 있다고 해서 음란성이 ‘당연히’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마치 문학성이 있으면 음란성이 ‘당연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부분 무마될 수 있다는 듯이 읽힌다. 뒤 문장에서는 문학성 여하에 따라서는 음란성이 있더라도 처벌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문학성으로 음란성이 치유되는 경우는 예외적이며 폭이 좁은 것처럼 해석된다. 상호 모순된 느낌이고, 앞뒤 기준이 현저히 달라 보이며, 두 기준 사이에는 공백의 중간 지대가 있어 보인다. 장정일은 아마도 뒤의 기준을 적용해 유죄를 받은 것 같다. ‘음란성을 완화하기에는 문학성이 약하다’고. 하지만 앞의 기준을 적용했다면 그래도 유죄였을지는 의문이다. ‘상당한 수준의 성묘사가 있지만 문학성이 있어 음란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소설이 이럴진대, 만화가 화를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만화가 이현세도 고초를 겪었다. <천국의 신화> 중 고대사 일부 장면이 얻어걸렸다. 구속은 면했지만 1심에서 벌금 300만원 형을 받았다. 항소심에서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헌법재판소에서 관련 법률조항을 위헌이라 선언했고, 그에 따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6년이었다. 1심에서 기준으로 채택한 ‘음란성’ 개념은 위 두 판결에서와 유사했다. 한국의 대표 만화가는 6년의 법정 투쟁으로 창작의욕을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실은 우리도 큰 손실을 입었다. 그 일이 없었더라면 그가 6년간 만들었을 굉장한 작품들 말이다.

여기서 일본과 잠깐 비교해보자. 전 세계에 팬이 있는 나가이 고(永井豪)는 옷이 찢겨나가는 변신물의 원조 <큐티하니>, 알몸으로 쌍절곤을 휘두르는 <겟코가면>, 잭나이프를 들고 대량 학살하는 <바이올렌스 잭> 등을 그렸다. 그는 일본에서 ‘겨우’ 소년만화가에 불과하다. 성인 극화의 대가 고이케 가즈오의 <크라잉 프리맨>은 한국에서는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불법영상의 아이콘이 되어 비디오 첫 화면을 장식했지만, 할리우드는 영화로 제작했다. 일본 작가들이 수출에 전력투구하는 동안 이현세 선생은 형사재판에 전력투구해야 했다. 어딘가 기분이 안 좋아진다.

‘음란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논쟁이 많고 판례도 변했지만, 그건 법률가들이 벌인 지면상의 싸움에 불과할지 모른다. 실은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전 미국 연방대법관 포터 스튜어트가 말했다. 보면 안다(I know it when I see it). ‘나는 이게 음란물인지 아닌지 모르겠어’ 할 사람이 있을까? 음란물 여부를 직관적으로 인지한다는 건 논리의 영역이 아니란 얘기다. 그 실체란 어쩌면 우리 ‘공동체의 정서’에 거슬린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음란성을 이유로 단죄하기란 조심스럽다. 음란에 찬성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옳다 나쁘다 얘기야 할 수 있겠지만, 형사처벌을 하는 건 차원이 다르단 것이다. 각자 기준이 다르고, 수용 한도에도 차이가 있다. 마광수 교수의 작품이 논쟁에 휘말리는 정도는 이해된다. 하지만 돌연 구속이라니? 살인, 폭행, 사기같이 외부 징표가 명백한 범죄라면 고민할 필요 없다. 행위가 있을 때 처벌하면 된다. 음란성은 다르다. 주관적이고 모호하다. 행위자 입장에서도 그렇다. 내가 쓴 책이 음란물일지 아닐지 알기 힘들 수 있다. 내 작품이 누군가의 심사를 건드려 음란물 판정대에 오를 거라고 미리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작가에게 가해지는 처벌이(이런 이유의 처벌에 반대하지만 설사 한다 하더라도) 곧장 구속이라든가 하는 비약적인 제재여서는 곤란하다(일반론으로도 그렇다. 법률 조항이 모호해서 자신의 행위가 범죄가 되는지 확실하게 인지하기 어려웠다면 가혹한 처벌은 피해야 한다).

경향신문

<즐거운 사라>는 우리나라에서 푸대접받았지만 일본에서는 1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한국문학 최대의 수출상품을 죽여버린 장본인은 자국의 법이었다. 마광수 교수를 처벌하면서 수많은 예비 작가들의 잠재적 걸작도 모두 그들의 머릿속 사전 검열로 폐기처분되었다. 여기엔 음란물이 아닌 다수가 포함되어 있었을 게 분명하다.

처벌의 돌발성, 강폭성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이건 표현의 ‘내용’에 대한 통제다. 이렇게 손쉽게 이뤄져선 안된다. 대놓고 만든 포르노물이라면 또 몰라도, 외피는 문학작품이다. 굳이 통제를 하고 싶다면 표현의 방식, 시간, 장소 등의 통제가 먼저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게임이나 TV프로그램 등에서 그러하듯 등급제를 통해 청소년물과 성인물을 분류하고, 등급을 위반해 유통하는 경우 제재한다든가 하는 조치다.

성인물의 내용 통제는 더 조심스럽다. 성인이 만든 산물을, 다른 성인이 보겠다는데 왜 또 다른 성인이 나서서 막겠다는 걸까? 그 성인은 다른 성인보다 우월한 ‘더 성인’인가? 29금, 39금, 49금도 있어야 하는 것일까? 이 오지랖은 결국 ‘남이 보는 게 보기 싫다’는 것 아닐까. 이쯤 되면 음란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보다 타인의 머리 위에서 자유 의지를 통제하려는 사람이 더 문제인 것 같다. 백번 양보해서 도덕 문제를 왈가왈부하는 건 그렇다 치고, 왜 국가 형벌권력이 동원되는 건가. 이건 암묵적 약속 위반이다. 장소는 장터의 한구석 소설판. 한 작품을 두고 언쟁이 벌어졌다. 말이 막힌 한쪽이 잠깐 기다려봐, 하더니 집에 들어가 돌연 몽둥이를 들고 나타났다. 해당 작가는 혼비백산. 나머지 작가들은 마음을 졸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판은 전부 깨지고 장터에 남은 사람은 실신한 작가와 그를 밟고 선 몽둥이 주인뿐이다. 다짜고짜 몽둥이찜질하기 있기, 없기?

이 판결들에 드는 의문이 하나 더 있다. 고의성 문제다. 과실범이 아닌 한 모든 범죄에는 고의가 필요하다. 음란물 제작도 마찬가지다. ‘독자의 호색적 흥미를 돋운다’는 인식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대개는 음란물의 존재 자체로 추정되지만, 포르노 광고물과 문학작품을 같은 선상에 놓고 취급할 수야 없다. 마광수 교수가 음란물을 제작한다는 고의를 갖고 있었을까? ‘미필적 고의’는 있지 않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즐거운 사라>는 성에 위선적인 우리 사회를 향한 문명비평이다(주인공 사라의 생활 자체가 문명비평이다). 적어도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면, 음란물을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전제로 하는 유죄 판정에는 신중해야 한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같은 형사소송법상의 원칙이 왜 마광수 교수에게만은 적용되지 않았을까.

당시 판결에서는 ‘오늘날의 개방된 추세에 비추어 보아도’ 음란하다는 표현을 했다. 당대의 정서가 기준에 반영된다는 뜻일 거다. 그래서일까, 세월이 한참 흐른 2008년, 기준을 달리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문학성과 예술성이 음란성을 ‘다소 완화시킬 수 있을 뿐’이라고 하던 기존의 입장을 바꾸었다. 음란물은 ‘전적으로 성적 흥미에만 호소하고, 하등의 문학적·예술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 것’이라는 입장을 택했다. 이 기준은 미국보다 오히려 진보적이다. ‘문학적인 기색’만 있다면 음란성의 덫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대로라면 문학성이 분명한 <즐거운 사라> 같은 작품이 음란물 판정을 받는 수모를 겪지 않을 것 같다.

<즐거운 사라>를 복권시킬 수 없을까. 우선 재심청구는 곤란하다(재심은 명백한 새 증거가 발견되었을 경우 등에만 가능하다). 대신 <즐거운 사라>가 재출간된다면 어떨까. 바뀐 판례에 따르면 음란물 판정이 유지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벗어던지는 선언으로서의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시대를 앞서간 이 괴작을 뒤늦게나마 보존하는 기록행위로서도 필요할 성싶다. 세대가 바뀌었을 때, 후세대들이 그 유명한 <즐거운 사라> 어딨어? 하고 찾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필자 도진기

경향신문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되었고, 2010년 단편소설 <선택>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8년 동안 주중에는 판사로, 주말에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면서 10여권의 책을 썼다. 2017년 2월 공직을 떠나 변호사가 됐다. 작품으로는 <정신자살>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순서의 문제> <모래 바람> 등이 있고, 2014년 <유다의 별>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대상을 수상했다.


<도진기 변호사>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