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석 경제부 기자 |
"강대국 대사관 주변이면 괜찮다 싶고요. 외국계 큰 기업이 가깝다면 그쪽 가까이 몸을 피해도 되지 않을까요?" 경제학 교수에게 북한이 공격을 감행하면 어디로 피신할지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북측이 강대국 시설은 타격을 자제할 테니 외국 기업이 많을수록 전쟁 억지력이 커진다는 얘기다. 경제부처 장관을 지낸 전직 관료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미국, 중국 쪽 기업이 많이 들어올수록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나라가 됩니다. 안보에 도움이 되죠. 제너럴 모터스(GM) 정도의 대기업이면 미군 한 개 사단이 주둔하는 효과가 있어요."
그러나 현실은 어둡다. 글로벌 기업들은 점점 한국을 외면하고 있다. 미국 포천지 선정 '글로벌 500대 기업' 중 우리나라에 진출한 기업은 2011년에 273개 사였는데, 2015년에는 252개 사로 줄었다. 영국 유통업체 테스코가 홈플러스를 팔고 나갔고, HSBC, 골드만삭스 등 글로벌 은행들이 서울에서 벌이는 사업을 대폭 축소했다. 요즘엔 GM이 철수한다는 말이 계속 나온다. 수익이 마뜩잖다며 떠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외국 큰손들이 한국 땅에 좀처럼 새로 입성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강성 노조가 위세를 부리고 고용 유연성이 워낙 경직돼 있어서라는 이야기가 여전하다.
유엔무역개발협의회(UNCTAD) 집계를 보면, 2000년에는 전 세계 외국인 직접투자(FDI) 중 우리나라가 유치한 금액의 비중이 0.84%였는데, 이후 0.68%(2010년), 0.52%(2016년)로 계속 줄어들고 있다. 해외 투자 유치 경쟁에서 낙오를 거듭한다는 얘기다. 그렇다 보니 국내에 쌓아둔 해외 투자금 순위에서 세계 29위(2015년 미국 CIA 집계)에 머무르고 있다. 경제 규모 11위 국가로서 민망한 일이다. 경제 규모가 우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폴란드(23위), 태국(26위), 칠레(28위) 순위가 더 높다.
휴전 중인 국가라는 특수성 때문에 해외 투자 유치가 애초부터 어렵다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규제를 없애고 세제 혜택을 제공해 한국 땅을 밟는 외국 기업이 늘어나도록 유도해야 하는 것 아닐까. 새 정부는 반대로 '당근'을 하나둘 없애고 있다. 법인세 최고 세율을 인상하고, 급격하게 최저임금을 올려 경영자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그러니 산토끼(외국 기업)를 못 잡을 뿐 아니라 집토끼(국내 기업)마저 서둘러 빠져나가고 있다. 2007년부터 작년까지 10년간 국내 기업의 해외 투자는 2762억달러로 외국에서 들어온 투자금(950억달러)보다 2.9배 많았다. 그런데 올해 상반기는 이 비율이 4.4배(나간 돈 219억달러·들어온 돈 50억달러)로 자본 유출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찜찜하고 두려운 일이다. 외국 기업이 많아지면 고용과 세수가 늘어나는 건 기본이고, 안보 위기 시 안전판 구실을 한다.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주고서라도 해외 기업을 더 많이 유치해야 한다.
[손진석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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