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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Why] 100년前 제주 한 동네 젊은이, 한꺼번에 日 이주… 22년째 파헤친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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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고내리 출신 재일동포' 연구하는 이인자 교수

당시 일본간 젊은이는 누구

대부분 14~20세 연령대… 방적·고무공장서 일하다가 방제조업에 몰렸죠

광복 후에는 어찌 됐나

아내·아이들 제주 보냈지만 가장은 日 남는 경우 많아… 일자리가 거기 있었으니까

1997년 4월 25일 낮 제주공항. 일본발 비행기에서 검은색 천을 씌운 관이 내려졌다. 재일동포 정모(92)씨 시신이었다. 1905년 제주시 북서부에 있는 애월읍 고내리에서 태어난 정씨는 광복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죽으면 고향에 돌아가 50년 전 사별한 남편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재일동포 2세인 딸과 조카 등 유족이 시신의 뒤를 따랐다. 고내리에서 정씨 5일장이 치러졌다. 그 닷새 동안 정씨 마지막 길을 기록한 이가 있었다. 당시 32세 일본 교토대 인류학과 대학원생 이인자(李仁子)씨는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조선일보

일본 도호쿠대 이인자 교수는 1995년부터 제주 고내리 출신 재일동포를 연구해 왔다. 올해는 고내리 주민 도일(渡日) 100주년이다. 이 교수는 “처음 재일동포를 조사할 때부터 같은 수첩을 쓰고 있는데, 현재 300권 정도 썼다”고 했다. / 이진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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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매장을 위해 돌아온 시신은 고내리 마을 사람들에게 객사(客死)다…. (이 때문에) 시신은 집 안에 들일 수 없다. 마을에서 떨어진 공터에 텐트를 치고 시신을 안치하는 제단이 준비된다… 4월 말인데도 밤은 꽤 춥다.'

지난달 11일 고내리에 손님 7명이 왔다. 작년 숨진 고내리 출신 재일동포 오모씨의 아내와 세 아들, 두 손녀 그리고 도호쿠대 교수 이인자(52)였다. 유족은 오씨 1주기를 맞아 이곳에 왔고, 이인자씨는 이를 기록하려고 따라왔다. 이 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오○○, 1931년생. 고내리에 오씨 집안 납골묘를 만들다. 고내리 출신 재일동포뿐만 아니라 제주, 서울 사는 오씨도 잠들 수 있게 하다. 유족은 납골당에 있던 오씨 초상화를 회수. 이곳에 남겨두면 외로울 것 같다면서.'

22년간 고내리 출신 재일동포 연구

이인자 교수는 1995년부터 제주 고내리 출신 재일동포를 연구해 왔다. 이를 위해 일본~제주를 왕복한 횟수만 80번이 넘는다. 그는 다음 달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고내리 주민 도일(渡日) 100년 기념행사'를 재일(在日) 고내리 친목회와 함께 준비 중이다. 지난달 서울을 방문한 이 교수를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고내리 주민이 일본에 건너간 지 100년이 됐다고요.

"고내리 친목회 기록에 따르면 1917년 오두만이라는 청년이 일본에 건너갔어요. 돈을 벌려고요. 도쿄 아라카와구(區) 방적공장에 일자리를 얻은 뒤 고내리 동네 사람들을 불러들였어요. 1930년쯤에는 200여 명으로 늘었죠. 대부분 14~20세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방적공장, 고무공장, 제유(製油)공장 등에서 일하다 서서히 가방제조업으로 몰렸다고 합니다."

―광복 후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내와 아이들은 고내리로 돌아갔지만 가장은 일본에 남는 경우가 많았어요. 일자리가 일본에 있었으니까요. 이어 4·3사건과 6·25전쟁이 터지면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늘었어요.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전까진 대부분 밀항이었죠. 이렇게 모인 고내리 주민 대부분이 일본 도쿄 아라카와에 밀집해 살았어요. 밀항으로 건너온 이주자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고향 사람뿐이었으니까요. 고내리 출신 이주 1세대들에게 아라카와는 제2의 고내리가 됐죠. 재일 고내리 친목회 1990년 명부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 사는 고내리 출신자가 300가구가 넘었어요. 그해 제주 고내리에는 250가구 정도가 살았으니 가구수가 역전됐던 거죠." 현재 재일 고내리 친목회 명부에는 약 400명이 올라 있다. 친목회가 열릴 때마다 재일동포 1세에서 5세까지 평균 150명 이상이 모인다고 한다.

―친목회 규모가 상당히 크군요.

"고내리 친목회도 올해 90년이 됐어요. 1949년부터 1980년까지 월간이나 계간으로 친목회지를 발간할 정도였죠. 돌, 결혼까지 세세한 소식을 실었어요. 1960년대에는 누가 북송선(北送船)을 탔다는 소식이 많아요. 고내리 친목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분들인데 그들이 계속 일본에 계셨다면 친목회가 더 많이 발전했겠죠."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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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나미 피해주민에 고내리 얘기 들려줘

―일본에서 죽은 뒤 제주도로 옮겨져 매장하는 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제주도 사람들은 이를 생장(生葬)이라고 합니다. 1934년 일본인 지리학자 마스다 가즈지(�田一二)는 오사카에서 제주로 가는 배 안에서 관을 목격했다고 기록했어요. 당시 뱃삯이 매우 비쌌지만 제주행 배에는 이렇게 매번 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죠."

―고내리 출신 재일동포가 제주에 있는 무덤 관리하는 게 쉽지 않았겠군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전까지는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니까 고향 친척에게 돈을 보내기도 했어요. 이후 고내리 동포 1세대는 대부분 성씨별로 제주도에 친족공동묘지를 만들고 고향 친척에게 관리하게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일본에 살게 됐지만, 죽어서는 다들 고향 땅에 잠들고 싶었던 거죠."

―1세대가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2, 3세대가 잘 따랐나요?

"물론 모든 자녀가 유언을 따르는 건 아니에요. 재일동포 1세대와 2, 3세대 간 갈등이 심한 가정도 있고요. 하지만 고향 땅에 묻히겠다는 유언이 세대를 연결하는 뜻밖의 선물이 되기도 해요. 2세 중에선 '나도 죽어서 고내리 공동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사람이 생겼고요. 재일동포들이 성묘와 벌초를 위해 고내리를 찾으면서 고향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죠. 일본에서 일본어로만 인터뷰했던 재일동포 2세가 한국에선 꼭 한국어로 말하려 할 때도 있고요.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제가 만났던, 이제는 세상을 떠난 재일동포 1세대들에게 혼잣말을 해요. '고내리 전통이 모두 사라질까 봐 걱정하셨죠? 이것 보세요.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렇게요."

이 교수는 고내리 출신 재일동포를 성씨별로 정리했다. 족보처럼 세대별로 분류하고, 숨졌을 때는 생장 여부도 기록해 놨다.

―정말 꼼꼼하게 조사했네요.

"인터뷰한 재일동포가 1세에서 3세까지 1000명이 넘을 거예요. 저는 충남 출신인데, 제주도 사람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접근하기 힘들었어요. 방언도 하나도 몰랐고요. 안 되겠다 싶어 연구 초기 아예 고내리에 6개월 눌러앉아 살았어요. 매년 재일 고내리 친목회에 3~4번 빠짐없이 참석하니까 그들이 마음을 열더군요. 몇 차례 밀항 시도하다 붙잡힌 얘기, 겨우 밀항 성공해서 일본 갔더니 남편 또는 아버지가 새로 가정을 꾸렸더라는 얘기는 연구 시작 후 한참 지나서야 들었어요."

이 교수는 2011년부터 동일본 대지진 피해지역인 미야기현과 이와테현 마을 5곳에서 현장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들 마을은 쓰나미로 대부분 침수됐고, 대다수 주민이 안전지대로 이주해 정부가 제공한 가설 주택에 살고 있다. 이 교수는 "피해주민에게 고내리 얘기도 해준다"고 했다.

―왜 고내리 얘기를 하나요?

"쓰나미 피해지역 주민은 마을이 사라진 것처럼 자기들도 잊힐까 봐 두려워하고 있어요. 전통을 유지하려고 매년 마쓰리(축제)를 하지만 다음 세대에서 명맥이 끊길 거라 생각하죠. 이들에게 '고내리 출신 재일동포 1세들도 고향을 떠나 일본 도쿄에 살게 됐지만 후손들이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얘기하니까 큰 위안을 받더라고요. 또 제가 고내리 출신 재일동포를 20년 넘게 연구하고 있다고 하면 저를 더 신뢰하고요."

"인류학자는 경계인"

이 교수는 이외에도 전북 군산에 집단 거주한 6·25 피난민,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서 살다 일본으로 돌아온 탈북자, 일본 농어촌 지역에 있는 국제결혼 여성을 조사·연구해 왔다.

―대부분 실향(失鄕)과 관계가 있군요.

"일종의 경계인이죠. 인류학자도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느 한쪽에 서지 않고 연구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좋은 연구 결과가 나올 수 있어요."

이 교수는 "돌이켜보면 제 인생도 계속 경계에 머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한양대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2000년 일본 명문대인 도호쿠대 교육학부 교수가 됐다. 일본인과 결혼해 고등학생 아들 한 명을 뒀다.

"저는 제 아들한테 '너는 한국인이다, 너는 일본인이다' 강요하지 않았어요. 대신 고향을 느끼게 해주려고 노력했어요. 한국에 연구하러 올 때는 아들과 같이 와서 고향의 냄새와 맛을 경험하게 했고요. 한국에선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 간격을 둘 때 편한지 스스로 깨닫게 하고 싶었어요. 아들이 한국에서 초등학교 4~5학년을 다녔는데 그 전까진 한글을 배우라고 강요한 적 없어요. 아들에게 한국은 맛있는 음식이 있고 친척과 친구가 따뜻하게 반기는 곳이죠."

이 교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물론 입맛으로 따지면 아들도 한국 사람이죠. 음식은 항상 제가 하니까요."

[전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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