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속으로] 인 투 더 와일드
존 크라카우어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인 투 더 와일드'의 주인공인 크리스토퍼 매캔들리스는 야생의 삶을 꿈꾸며 알래스카로 들어갔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에머리대를 우등으로 졸업했던 그는 친구와 가족 모두를 뒤로한 채 '오직 나 자신과 대면하겠다'는 의지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과 차까지 버리고 걷고 또 걷는다. 하지만 1992년 8월, 알래스카 오지의 버려진 버스 안에서 싸늘하게 식은 그의 시체가 발견된다. 그는 외롭고 혹독한 그곳에서 16주를 버텼다.
영화 ‘인 투 더 와일드’ 주인공은 부유한 가정환경과 보장된 미래를 모두 버리고 홀로 여행을 떠난다. 가족, 친구와의 연락을 모두 끊고 이름도 가명을 쓰기 시작한다. 오롯이 혼자가 되는 것만이 ‘오직 나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라 여겼기 때문이다. 최종 목적지 알래스카에 도달해 서서히 굶어 죽어가면서 남긴 주인공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하다. “행복은 나눌 때 의미가 있다.” / 픽사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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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우연히 기사로 쓰게 된 존 크라카우어는 이 남자 크리스의 삶과 죽음에 매혹됐다. 그는 1년 넘게 크리스에 대해 취재한 후 이 책을 썼다. 등반가이자 산악문학작가인 존은 그의 마지막 여정부터 가족과 친구, 그가 길에서 만난 사람들, 일기와 편지, 메모 등을 차례로 파헤쳤다. 그렇게 그는 크리스가 죽기 전 읽었던 책의 목록을 밝혀낸다. 그중에는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레오 톨스토이의 '행복' 같은 예상 가능한 책들이 놓여 있었다.
"크리스 매캔들리스는 전형적인 오지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비록 경솔했고 오지에서 생존하는 방식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무모할 만큼 부주의하긴 했지만, 그는 무능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무능했다면 113일 동안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반사회적 인물도 추방자도 아니었다. 매캔들리스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말하기는 힘들지만, 분명 그런 것들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마 순례자쯤 되지 않을까."
영화 속에서 크리스는 스스로를 '수퍼 방랑자'라고 불렀다. 그는 자연을 보며 끝없이 자신과 대화한다. 바다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을 알고 있다고, 인생이란 강해지는 것보다 강함을 느끼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자동차로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자신을 한계 상황 속에 놓아두길 즐겼다. 자신이 어디까지 언제까지 버티고 견딜 수 있는지. 결국 자코메티의 조각상처럼 본질만 남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 것이다. 암흑과 고요, 거대한 야생 속에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가족부터 버려야 했다. 그는 연결되길 거부했고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건 미국 서부의 압도적인 대자연의 경관이 아니었다. 몇백㎞를 달려도 주유소 하나 나오지 않는 애리조나의 황야가 아니었다. 주인공 크리스가 누군가 버린 버스 안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잊기 위해 새를 잡고 풀을 뜯어 먹는 필사적인 장면도 아니었다. 나는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흥미로웠다. 서점 트럭을 달고 다니는 커플과 존 바에즈를 닮은 어린 여자, 크리스를 아들처럼 대했던 나이 든 남자 말이다. 가족과 연락하지 않은 지 오래됐다는 크리스 말에 다들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던 그들, 어쩌면 우연히 만난 이웃이라 얘기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 크리스는 같이 떠나거나 함께 머물기를 바라는 그들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혼자서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엔딩이 주인공 크리스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 이유가 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 너무나 교훈적이란 사실 때문에 이것이 만약 한 편의 소설이라면 이 모든 것이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는 죽기 전 "행복은 나눌 때 의미가 있다"고 적는다. 혼자 있기 위해 긴 사투를 벌인 한 남자의 마지막 깨달음이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에만 삶에 의미가 생긴다는 건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지금처럼 독립과 자립을 강조하는 문화 속에서, 그의 깨달음은 연결과 공동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가 거절하고 거부하고 떠나온 많은 것들 말이다. 어쩌면 그 속에는 그가 경멸해 마지않았던 아버지와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크리스처럼 떠나는 젊음을 본다. 떠나지 못해 괴로운 청춘은 더 많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어쩌면 지금의 우리를 가장 사로잡는 모험은 더 이상 엄청난 자연이나 풍광을 보는 게 아니라 나 자신과 대면하는 체험, 자아 찾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광풍 속에서 때때로 이런 의문이 든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나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저 먼 타국까지 가서 찾아야 하는 걸까.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서 그것이 정말 찾아질까. 더 본질적인 질문은 하나 더 남아 있다. 사람들은 종종 나의 본질이 내 내면 안에 오롯이 담겨 있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면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본질이 과연 내면에 있는 걸까.
나는 내면의 문을 열고 외면으로 나아가 확장될 때 나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외면에는 타인이라는 커다란 문이 놓여 있다. 나는 정체성이란 오롯이 하나일 수 없으며 그것이 내가 맺는 수많은 관계에 대한 리액션의 총합이라 믿는다. 정체성은 관계를 통해 변화한다고 말이다. 온순한, 수다스러운, 고요한, 신경질적인, 무심한 내 안의 내가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끊임없이 표출된다. 그러므로 나를 찾기 위해선 저 먼 곳이 아닌 바로 이곳, 내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가족, 친구, 공동체 안의 나가 나의 시작이며 과정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크리스처럼 그 모든 문장에서 뜨거운 열정을 느꼈던 소로의 작품 '월든'보다 지금의 내게 소중한 건 도시의 복잡한 삶 속에서 야생 같은 고요함을 느끼는 지혜다. 먼 곳으로 떠나지 않아도 순례자처럼 사는 것이다. 소로 역시 월든 호숫가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자족한 시간은 2년 남짓이었다. 여행이란 그 어떤 것이든 돌아옴을 전제한다. 나 역시 '나를 찾는 여행'이란 말의 이면을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나야 했었다.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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