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 소설가 |
얼마 전, 여행 잡지의 취재차 수안보에 다녀왔다. 전성기의 화려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고즈넉한 느낌이 좋은 곳이었다. 오랜 시간 문을 닫은 '와이키키 관광호텔'의 거대한 스산함은 이곳의 화려했던 과거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여행을 가면 그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작가가 느꼈을 감정이나 느낌을 현장에서 체험하는 건 호사스러운 경험이다. 수안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다시 봤다.
영화는 고교시절 한때 7인조 록 밴드의 보컬이었던 주인공 성우가 유흥주점의 원 맨 밴드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웃 여고 밴드의 보컬이었던 그의 첫사랑 인희 역시 남편과 사별 후 트럭 행상을 하며 살아간다. 낡아가는 수안보는 이들의 내면 풍경 같다. 술집에서 성우를 만난 고교 동창은 이렇게 묻는다. "넌 행복하냐? 우리 중에 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놈은 너밖에 없잖아.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 하면서 사니까 행복하냐고!" 성우는 끝내 답하지 못한다.
젊은 날, 한때의 재능이 무서운 건 그것이 인생의 짐이 되기도 하는 탓이다. 성우에게는 음악이 그렇다. 가슴 뛰는 일, 나만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하라고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말은 평범한 일상을 사는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열패감을 주는 말이 되기도 한다. 삶은 공평치 않아, 누군가에게는 '누리는 것'이지만, 누군가에겐 '버티거나 견디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성우의 반주에 맞춰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를 부르는 인희의 모습이어서 좋았다. 로커를 꿈꾸던 두 청춘이 중년이 되어 부르는 그 노래가 견디거나 버텨낸 존재에게 주는 위안이라 좋았다. 꿈꿔 본 곳에 닿기 위해 갖은 힘을 써 본 삶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삶이라 감히 말할 수 있나. 뿌연 안개가 자욱한 충주호의 유람선에서 나는 심수봉의 노래를 들었다. "서러운 세월만큼 안아주세요~"라는 가사를 나도 모르게 따라 불렀다. 꿈을 가진다는 건 어쩌면 서러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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