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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4 (월)

'시인의 사랑' 대신 울어 주는 남자, 양익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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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시인의 사랑' 양익준

중앙일보

양익준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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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정자도 없다. 현택기(양익준)란 남자, 아내의 구박에도 ‘꽃노래’와 도넛만 물고 사는 천하태평 시인이다. 그래도 그에겐 누구보다 세밀하고 찬찬한 마음씨가 있다. ‘시인의 사랑’(9월 14일 개봉, 김양희 감독)은 예술과 현실, 아내와 낯선 소년 사이에서 열병을 앓는 시인의 이야기다. 시인으로 살며 양익준(42)은 무엇을 쓰고 읽고 생각했을까.

-‘시인의 사랑’, 무엇에 끌렸나.

“지난해 일본에서 ‘아, 황야’(2017, 키시요 시유키 감독)라는 영화를 찍던 도중, 김양희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받았다. 원래 그리 신속한 타입이 아닌데, 책을 덮자마자 전화를 걸어 ‘하겠다’고 했다. 제주도 느긋한 포구 마을, 아주 평범하게 생계를 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독특한 사람이 있다는 설정이 좋더라.

워낙 이상한 이야기에 끌리는 편인데, 내겐 ‘시인이 사랑’이 그랬다. 불편하고, 싫은 이상함이 아니라, 한 번쯤 겪어보고 싶은 이상함이었달까. 출연을 결심한 뒤 우연히 정재은 감독님을 만났는데, ‘시인의 사랑’ 시나리오를 읽었다면서 누가 캐스팅될지 궁금하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그랬지. ‘아, 모르셨구나, 그게 저예요’. 으하하.”

-시인 현택기는 그간 연기해 온 캐릭터와 사뭇 다른데.

“아주 다르지. 감정 표현이랄 게 거의 없는 사람이다. 욕도 할 줄 모르고(웃음). 감정 표현이 솔직하고 확실한 연기 스타일을 선호하는 편이라, 초반에는 택기를 연기하는 게 답답했다.

잠자리에서 갑자기 몸을 더듬는 아내 강순(전혜진)을 피하며 택기가 ‘아아 진짜’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택기에겐 그나마 강한 표현이다. 택기의 캐릭터를 두고 김 감독님과 싸우기도 많이 했다. 나는 계속 감정을 드러내려고 하고, 감독님은 계속 누르려고 했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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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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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기는 소년 세윤(정가람)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는 인물이다. 이성애에 빠진 인물을 연기하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었을 것 같다.

“택기는 영감이 부족해서 환장하는 사람이다. 시만 쓰며 살고 싶지만 팍팍한 현실이, 아내의 구박이 자꾸 그를 괴롭히거든. 그런 택기 앞에 너무나 아름답고도 불안해 보이는 소년이 나타난 거다. 그때의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게이라서, 남자라서가 아니라, 시인이 발견한 아름다움의 대상이 공교롭게도 남자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여러 차례 시를 읽는다. 이렇게 차근차근한 목소리를 가진 배우인지는 처음 알았다.

“의외로 목소리 좋다는 이야기, 라디오 진행하면 잘하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웃음). 감독님이 워낙 디테일한 분이라, 후시녹음할 때는 말의 속도·억양 등을 꼼꼼히 계산하며 읽느라 고생 좀 했다. 처음에는 한 문장씩 녹음하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끊지 않고 읽는 방식으로 녹음을 했다. 조금 틀리더라도 그 편이 감정이 더 사는 것 같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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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익준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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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시를 즐겨 읽나.

“좋아한다기보다 시를 소리 내어 읽는 그 행위 자체를 좋아한다. 그냥 산문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와 정서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들을 소리 내어 읽으면 묘한 맛이 나거든.”

-‘시인의 사랑’에서는 어떤 시가 맘에 들던가.

“현택기의 실제 모델인 현택훈 시인의 ‘내 마음의 순력도’. ‘내 마음의 순력도를 펼쳐 놓고/현재 나의 경로를 짚어봅니다.’로 시작해 ‘명진슈퍼에 간장 사러 가는 거리 즈음/멀리 가지 못하고,’로 끝나는 시다. 뭐랄까. 자유롭고 싶지만, ‘내 삶이 이래요’ 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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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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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촬영이 제주도에서 이뤄졌다.

“제주도를 좋아한다. 10년 전인가 올레길을 걷다가 한 달 내내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머물다 간 적도 있다. 바다가 코앞이고, 건물도 낮고, 제주도는 하늘이 더 넓은 느낌이 들어 좋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달라졌지만, ‘시인의 사랑’은 그나마 개발이 덜 된 해안가, 포구 마을 위주로 촬영이 진행돼 마음이 편했다.”

-상대역인 정가람은 어땠나.

“촬영 내내 캐릭터의 감정을 잃지 않으려고 집중하는 모습이 좋았다. 처음에는 ‘이 놈 뭐지’ 싶기도 했다. 촬영이 멈춰도 영화 속 소년처럼 나를 계속 간절하게 쳐다보더라고. 쉬다가 수다 떨다가 담배 피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리면 먼발치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정가람이 있었다(웃음).”

-아내 강순을 연기한 전혜진은.

“‘나 배우야~’ 하는 사람은 체질적으로 불편해 하는데, 혜진 씨는 정말 사람 같은 배우여서 좋았다. 영화의 강순처럼 실제로도 당당하고 솔직한 사람 같더라. 감독님한테 내가 자주 그랬다. ‘세윤한테 빠져야 하는데, 난 왜 이렇게 강순이가 사랑스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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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익준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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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대신 울어 주는 사람이야’라는 대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라. 배우는, 감독은 어떤 사람일까.

“배우는 어딘가에 살고 있을 누군가를 스크린 위로 데려 오는 사람. 영화를 보며 ‘에이 말도 안 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연기할 때는 세상 어딘가에 분명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감독은 음…. 아직 모르겠다. 예전에는 살풀이하는 마음이었는데, 요즘은 글쎄.”

-택기는 소년에게서 영감을 얻는다. 양익준은 무엇에서 영감을 얻나.

“낯선 환경. 그래서 1년에 서너 달은 해외에 나가 있으려고 한다. 집이나 안락한 카페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거든. 우디 앨런 감독은 침대 위에서 시나리오를 쓴다는데, 난 절대 못한다. ‘똥파리’(2009, 양익준 감독) 시나리오도 이화여대 본관 앞 벤치로 두 달간 출퇴근하며 썼다.

‘똥파리’ 오프닝은 일본 후쿠오카의 한적한 호숫가에서 떠올렸다. 사람을 마구 패는 폭력적인 장면이었는데, 할아버지들이 느긋하게 낚시를 하는 평화로운 풍경 아래서 영감이 떠올랐다. 그런데 결국 쓰고자 하는 욕구가 커야 영감도 생기는 거겠지.”

-한동안 연출을 쉬었다. 욕구가 사라졌나.

“올해 끝나는 대로 연기를 멈추고, 내 영화를 준비할 생각이다. 아직 구체적인 건 하나도 없지만 무작정 쉬면서 구상해 볼 참이다. 낚시도 미끼를 던져 놓고 한참을 기다려야, 물고기가 찌를 물고 올라온다. 나만의 시간을 보내다보면 뭐라도 하나 걸리겠지. 오늘은 왠지 요괴 이야기가 쓰고 싶어진다(웃음).”

백종현 기자 jam1979@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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