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북·종북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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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합당한 주권에 의거하여, 또한 적법한 국제 절차에 따라 로케트(굳이 ICBM이라고 하진 않겠다)의 발사에 성공하였음을 민족의 일원으로서 경축한다. 핵의 보유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는 약소국의 가장 효율적이며 거의 유일한 방법임을 인지할 때, 우리 배달족이 4300년 만에 외세에 대항하는 자주적 태세를 갖추었음을 또한 기뻐하며, 대한민국의 핵 주권에 따른 핵보유와 장거리 미사일의 보유를 염원한다.”
고(故) 가수 신해철이 2009년 4월8일 북한이 광명성 2호 발사에 성공했을 때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다. 우파 민족주의자가 쓴 것 같은 이 글 때문에 신해철은 소위 보수단체들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해 고초를 겪었다. ‘술 먹고 썼다’는 이 글은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신해철은 다시 “무혐의 유감(ㅋ)”이란 제목의 글(2010년 2월1일)을 올려 “가수가 홈페이지에 쓴 글을 극우 단체가 고발한 것, 검찰과 경찰이 무혐의를 발표한 게 화제가 되는 일이 모두 해프닝”이며 “현 정권에서 시작된 대국민 겁주기 및 길들이기라는 민주주의의 명백한 퇴보 현상이 이 해프닝의 진원지”라고 소회를 밝혔다.
보기 드물게 당차고 주견이 뚜렷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신해철은 적어도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국내 정치에 끼치는 영향에 관한 사태의 ‘한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북의 도발(?)과 높아지는 ‘전쟁위험’(?)은 그것으로 밥 벌어 먹고사는 안보 장사꾼들을 흥하게 하고, 이명박·박근혜 정권하에서 민주주의 전체를 후퇴시키는 핑계가 돼왔던 것이다.
다른 큰 쟁점이 신해철의 글 안에 있다. 과연 핵 보유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는 약소국의 가장 효율적이며 유일한 방법인가? 그래서 드디어 “우리 배달족이 4300년 만에 외세에 대항하는 자주적 태세를” 가지게 된 것인가? 또는 우리가 이제 핵을 보유할 때가 된 것인가? 이는 단지 그의 생각만은 아니다. 지난 8월29일, 107주년 ‘경술국치일’에 머리 위로 날아온 북한 탄도미사일 때문에 온 일본이 충격에 떠는 것을 보면서 고소하다거나 통쾌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다. 그리고 소위 ‘보수’ 쪽에서 이제 연일 핵무장을 하자는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 주권을 말살당하고 참화를 당해온 한반도 주민이라면 그런 정도의 태도나 상상력은 가능한 것 아닌가? 핵과 미사일은 ‘약소민족의 자주권’을 높이는 것이 사실 아닌가? 그러나 이 물음에 긍정으로 답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는 너무 많다.
먼저 북의 핵과 미사일이 남의 동족에게 겨눠진 것이 아니어야 하고, 또 ‘자주권의 확보’라는 것이 김정은 정권의 안녕이어서도, 한반도 주민의 목숨을 볼모로 하거나 도리어 위험으로 귀착되는 것도 아니어야 한다. 현실은 실로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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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국회 앞에서 연 ‘종북세력 퇴출 및 종북정당 해산 촉구 기자회견’에서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 전쟁 가능성
한반도가 최고조의 위기에 처했다 한다. 온탕 냉탕을 오가며 언론은 트럼프와 김정은의 혐오스러운 입을 비춰준다. 정말 곧 전쟁이 난다는 말인가? 호들갑 이면의 사실을 들여다보면 전쟁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정설인 듯하다. 과거를 거슬러, 클린턴이 실제로 북한 폭격을 검토했다는 1994년에도, 북한군이 미군 정예 정보함 푸에블로를 선원 수십명과 함께 나포했던 1968년이나 판문점에서 미군 병사를 도끼로 살해했던 1976년에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방전쟁이든, 보복전쟁이든 전쟁이 곧 남북한 모두의 궤멸적 타격과 수백만의 죽음을 의미하기에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렇다면 과연 ‘안보위기’란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이용하려 드는 것일까? 위기란 이제까지의 동북아 4강과 남북 사이에 만들어진 힘의 균형과 관계의 구조가 달라지고 있고, 그것을 북한의 전략과 의도를 인정하는 방향에서 바꿔야 하는 과도기에 처했다는 말로 들린다(이 ‘균형’ 상태는 1990년대 이후 북한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만들어져 온 것이다). 또는 주변 강대국과 한·미·일동맹이 북한이 ‘사실상’ 핵 보유국임을 인정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남북한에는 설상가상 격으로 미·중 간의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고 ‘신냉전’의 구도가 굳어지고 있다. 남북의 코리아 놈들 따위 수백만이 죽든 말든 전쟁을 원하는 글로벌 군산·정치 복합세력이 실제로 있을지 모른다.
■ 맹목적 ‘반북’과 환상적 ‘종북’
북한은 연신 문재인 정부를 향해 ‘남조선 괴뢰’ 운운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종속적 한·미동맹을 겨냥한 ‘남조선 괴뢰’와 이제 군에서도 잘 쓰지 않는다는 ‘북괴’라는 욕설은 참 서글픈 것이다. 남북이 서로 주권국가로서의 근본 요건인 자주성과 독립성을 ‘지적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욕설은 오래된 맥락을 가진 것이다. 1948년 시작점에서의 대한민국은 이승만과 극우를 매개로 한 미국, 북조선은 김일성과 극좌파를 앞세운 소련의 힘에 의해 건설된 ‘꼭두각시’ 정권이라고 말하는 것이 틀렸다하기 어려웠다. 또 분단을 바라지 않는 수많은 민족주의자와 중도파·중간파를 배제·침묵하게 만듦으로써, 아니 대량 살상하고 나서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탄생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많은 대한민국 정치인들로부터 존경받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 김구는 5·10총선에 불참해 일부 우익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대한민국 ‘건국’을 보이콧했다. 대신 한국 우익 민족주의의 상징인 김구가 한 일은 북의 김일성과 대화하는 길에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승만 세력으로 보이는 자들에게 암살을 당했다. 미제 혹은 소련제 무기와 많은 외국군의 지원으로 두 ‘괴뢰’가 서로 수백만명을 죽이는 전쟁을 치렀지만 극복하기 어려운 원한과 트라우마만 남겼다. 이후 두 국가는 각각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써 태생의 한계와 원한을 씻고 정당성을 확보하려 해왔다. 남한은 다행히 웬만큼 먹고살 만하게 되고 민주화도 상당한 수준에서 이룩했다. 그럼에도 외세에 의존하며 민족이 서로를 적대하는 이 부자연스럽고 비합리적인 상태는 지속되고 있다.
■ ‘김일성 만세’와 ‘김정일 개××’
남북한은 적어도 세 가지 차원에서 때로 치명적이고 거의 언제나 소모적인 영향을 주고받는다. 두 국가는 세계무대에서 대외적으로, 각각의 국내 정치의 차원에서, 그리고 쌍방 간의 직접 작용을 통해 얽혀 있다. 남북이 차라리 완전히 서로 다른 두 개의 국가이면 좋겠다고 바라는 사람도 적지 않다지만, 각각의 헌법상으로나 정치·사회·문화·안보 어떤 차원에서도, 핏줄과 언어를 공유한 민족은 남이고 싶어도 남이기 쉽지 않다. 그래서 김정은은 대한민국 뉴스에 주연으로 계속 출연할 수밖에 없고, 외국에 나가는 코리안은 ‘사우스냐, 노스냐’는 왠지 얼굴이 붉어지는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전시작전권 같은 주권과 ‘자주’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북과 대화해야 한다는 역설을 감당해야 한다. 강대국 의존과 남북 갈등은 서로 양(陽)의 함수관계에 놓인다. 민족이 반목하고 갈등할수록 외세의 간섭력은 커진다. 해방 이후의 현대사 전반부가 그리고 지난 10년간이 바로 그런 과정이었다.
남북대화와 6자회담으로 북을 개방·개혁에 나서게 하고 핵개발을 중단시켜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던 근 10년여의 노력은 전쟁광 조지 부시의 미국과 남의 보수세력 때문에 물거품이 돼 사라졌다. 남북 간의 긴장이 높아지자 전작권 환수는 자연스레(?) 연기되고, 북은 아무런 실질적 제어를 받지 않고 핵무장의 마이웨이로 갔다. 남은 아무런 실효적인 수단 없이 개성공단 폐쇄와 같은 자해적인 방편이나 미·중의 힘에만 의존하게 됐다.
남한의 정치도 언제나 북의 존재와 남북관계에 의해 (거의 항상 좋지 않게)영향받아 왔다. 예컨대 ‘종북’이라는 키워드는 그 같은 상태를 표징한다. 이는 평등과 민주주의를 증오하는 지배세력의 핑계로나 권력정치의 술수를 위해 악용돼왔다. 근본적으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탄생과 함께 (북과 내통하는)‘빨갱이’를 죽이거나 잡아가두기 위해 구축된 국가보안법체제는 남한의 자유민주주의를 불구의 것으로 머물게 했다.
시인 김수영은 이런 현실에 대한 답답한 마음을 담아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썼다. “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그러나 국가보안법 제7조 고무찬양죄에 저촉될 ‘김일성 만세’를 표제로 삼아 자유민주사회 언론의 자유의 본질에 대해 읊조린 이 시는 발표되지도 못했다. 김수영은 출발이라 했지만, 최고의 지성인 조지훈이나 국무총리 장면 같은 이조차 그 반대가 한국식 ‘자유민주’의 ‘오메가’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너무나 유치하고 민주주의와는 병립될 수 없는 상황과 연결돼 왔다. 보수 논객이라는 모 변호사는 2012년 한 TV 공개토론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네가 종북이 아니라는 증거로 “김정일 개××”라는 말을 해보라 했다. 헌법상의 기본권(제19조 등)을 부정하는 ‘김정일 개×× 해봐’ 수준의 의식과 태도는 세상에 종북 아니면 반북 둘밖에 없다는 식의 비현실적이며 남한 극우 특유의 정신적 질환에 가깝다. 그래서 이 혐오병은 한국 사회의 다른 타자를 몰아세우고 공격하는 ‘김○○ 개×× 해봐’ ‘노○○ 개×× 해봐’ 같은 말로 쉽게 응용되기도 했다.
한편 일각의 근본적 민족주의나 북에 대한 지나친 ‘피해자화’(?)가 환상을 만들어온 것도 사실이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문제의식이 북한의 모순과 오류 모두를 용납하게 한 과잉으로 치달은 경우도 있었다. 진보나 좌파가 어떻게 현대세계 어디에도 없는 3대 세습 절대권력과 황당무계한 우상화를 지지하거나 참혹한 인권 유린을 용납할 수 있는가?
■ 딜레마들과 다른 상상력
지난 70년간 통일과 북한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은 남에 사는 사람들에게 민주사회에 걸맞지 않은 금기와 극복하기 어려운 딜레마를 안겨줘왔다. 정부는 통일과 분단 극복에 대한 민간의 논의를 억제·금지·독점해왔다. 북의 체제가 실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민족 공멸을 초래할지 모르는 벼랑 끝 전술을 통해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북한 인민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또 북 체제가 민주화·개방화돼야 남의 민주주의도 증진되기 때문이다. 분단은 이 사회의 젠더구조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단기·즉효 처방이 없다. 분단과 북한이라는 근본적인 위험과 딜레마를 설득·협상·인내로 천천히 변화시키는 것 이외의 방법도 없다. 이 와중에 우리가 변화해야 할 필요는 없는가? 전쟁을 억지할 제대로 된 자주력을 갖되, 더 많은 민주주의와 자유로써도 그들을 압도해야 한다.
김구가 진정 존경받는 것은 그가 자신의 이념이나 지위·체면 따위를 전혀 버려두고, 비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민족의 평화와 분단극복을 위해 협상의 길로 나섰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협상과 평화의 현실주의’를 상상하고 실천한 선대가 없지 않다. 햇볕정책이나 중립화 통일론도 금기와 이념을 초월하는 빛나는 실용노선이자 현실주의의 소산이었다.
‘종북’ ‘반북’의 성마르고 빈곤한 상상을 넘고 막전막후 가리지 않는 고차원의 평화전략만이 이리·사자 같은 주변 강대국의 간섭과 위기를 이겨낼 것이다. ‘한·미(일) 동맹’은 유일천고의 진리가 아니다. 한반도 전체 주민의 평화복리와 민주주의가 진리의 기준이다. ‘지금은 대화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바로 지금이 대화할 때라는 것을 가리킨다. 도널드 트럼프의 테이블 위엔 전쟁도 옵션이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필자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다. 한국 근대 독서사를 연구한 <근대의 책 읽기-독자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을 비롯해 <자살론> <대중지성의 시대> <1970 박정희 모더니즘>(공저)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공저)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 등의 책을 냈다.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다. 한국 근대 독서사를 연구한 <근대의 책 읽기-독자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을 비롯해 <자살론> <대중지성의 시대> <1970 박정희 모더니즘>(공저)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공저)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 등의 책을 냈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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