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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세상 읽기] 백만 난민 받은 메르켈의 총선 승리 / 김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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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2주 후면 독일 총선이다. 독일 현지의 분위기는 선거가 코앞에 다가왔음을 물씬 느끼게 한다. 특히 공영방송인 <아에르데>(ARD)와 <체트데에프>(ZDF)의 활약이 인상적이다. 저녁 방송 프로그램의 상당 부분을 선거 관련 내용으로 편성하여 독일 사회의 주요 의제들을 심층 조명하고, 정당 대표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치열한 토론의 장을 풍성하게 제공하고 있다.

독일 선거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이유는 자명하다. 영국의 브렉시트 충격, 미국의 트럼프 경악, 프랑스의 마크롱 이변으로 이어진 ‘불가측성의 시대’에 유럽연합을 이끌고 있는 독일의 정치적 변화는 유럽과 세계 정세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100만 난민을 받아들인 메르켈의 정치적 운명은 유럽이 직면한 난민 문제와 극우주의의 향방에 풍향계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정작 독일에선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선거의 열기가 사그라들고 있다. 이미 승부의 추가 기울었기 때문이다. 독일인의 80% 이상이 메르켈 총리의 승리를 예상하는 가운데 사민당 후보 마르틴 슐츠와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가장 최근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총리 후보 선호도는 메르켈 57%, 슐츠 33%이고, 정당 선호도는 기민당 38%, 사민당 22%, 좌파당 9%, 녹색당 8%, 자민당 9%, 아에프데(AFD) 9%이다.

사민당으로선 마지막 기회라고 기대했던 9월3일 양자 티브이 토론에서의 패배가 뼈아팠다. 슐츠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도, 선명한 차이를 부각하지도 못했다. “결투(Duell)가 이중창(Duett)이 되었다”는 비아냥 속에 슐츠는 차기 외무장관을 구걸하러 나온 것 같다는 조롱까지 받았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메르켈의 마지막 의회 연설을 ‘4기 메르켈 정부의 첫 시정연설’이라는 파격적인 제목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제 관심은 메르켈의 연정 파트너가 누가 되느냐에 쏠려 있다.

2주 후면 메르켈이 다시 총리로 지명될 것이고, 4기 메르켈 정부 구성에 착수할 것이다. 그렇게 독일 현대사의 최장수 총리가 탄생할 것이다. 통일된 독일에서 ‘동독’ 출신 ‘여성’이 16년간 정부를 장악하리라고 예견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이 야만과 실리의 시대에 100만 난민을 받아들인 총리가 다시 승리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메르켈 총리의 4선 성공은 동·서독 문제, 양성평등 문제, 난민 문제를 대하는 독일인들의 ‘성숙한 의식’을 빼놓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메르켈의 잇따른 승리가 갖는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난 70년간 독일의 정치지형을 규정해온 사민주의와 보수주의의 대결 구도에서 마침내 보수주의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뒀음을 뜻하는가? 그렇지 않다. 메르켈의 승리는 전통적인 기민당의 가치에 기인하기보다는 사민당의 이념을 과감하게 수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제, 핵발전소 폐기, 동성결혼 인정, 100만 난민 수용 등에서 메르켈이 보인 입장은 전통적인 기민당에 반하고, 사민당과 통하는 입장이다. 메르켈이 “독일 역사상 최고의 사민주의 총리”(<슈피겔>)라는 역설적인 호칭으로 불리는 이유다. 메르켈의 승리는 분명 사민당의 패배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곧 사민주의의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독일은 100만 난민을 받아들인 결과 이번 선거에서 전후 최초로 연방의회에 극우정당의 진입을 허용하게 될 테지만, 메르켈의 난민 정책을 승인함으로써 유럽의 인도주의적 가치의 수호자로서 도덕적 권위를 확고하게 굳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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