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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화)

[잃어버린 나를 찾아 입양인들이 돌아온다] "입양 뒤 행복한 삶…하지만 출생의 궁금증은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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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 잃어버린 나를 찾아 입양인들이 돌아온다

6·25 이후 발생한 수많은 전쟁 고아를 구제하기 위해 해외입양이 시작됐습니다. 1953년부터 작성된 한국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이국에서 새 가정을 찾기 위해 지난해까지 16만명이 넘게 고국을 떠났지요. 초기에는 수십, 수백명이었던 이들이 1970∼1980년대에는 매해 수천명으로 불어났고, 1985년 8837명으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아이에게 가정을 마련해주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라며 시작된 해외입양. 그러나 당사자인 입양인들은 정말 행복할까요. 좋은 부모와 가정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입양인도 있고 반대 경우에 처한 입양인, 입양 절차가 잘못 돼 추방을 당하는 입양인 등 상황은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뿌리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대부분의 입양인은 출생 정보, 친생부모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사람을 정의하는 데 정말 궁극적인 정보이지만 너무도 당연해서 입양인이 아니라면 공기와 같이 소중함을 잘 모를 겁니다.

그 근원적인 정보를 찾기 위해 해외입양인들이 태어난 땅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해외입양의 절정기였던 1985년으로부터 한 세대인 30여년이 지난 지금, 이들의 회귀 또한 절정기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최근에는 매년 수천명의 해외입양인이 한국을 찾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외입양인들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대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응원하길 바라며 그들의 이야기를 적어봅니다.

세계일보

지준성씨 어린시절 모습.


“현재의 삶에 만족을 느끼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저를 낳아준 분이 누구이고,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고 싶어요. 만약 가족을 만난다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원망하지 않는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지준성(31)씨는 미국 미주리주(州) 캔자스시티의 한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좋은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움은 없습니다. 입양된 여동생을 포함해 가족 모두와 입양에 대해 자연스럽게 질문하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인의 뿌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는 미련이 항상 남아있었습니다. 한국에 대한 알 수 없는 관심, 끌림이 있었던 것이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입양 서류에 1986년 3월7일생으로 돼있는 지씨는 서울 서대문구의 한 산부인과에서 태어났습니다. 미국으로 입양된 것은 그해 6월21일로 입양기관은 홀트아동복지회입니다. 지씨는 친모에 대해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공장에서 일하다가 스무살 되던 해에 자신을 낳았다는 것 정도 말고는 아는 게 없습니다.

세계일보

지준성씨가 입양된 뒤 어린시절 모습.


입양기관에 계속 정보를 요청해보지만 더 얻기는 매우 힘이 듭니다. 친모가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돼 사망확인서를 요청도 해봤지만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친부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답답해진 지씨는 이립(而立)의 나이가 된 지난해 가을 즈음 해외입양인연대(GOAL)의 모국방문 프로그램을 이용해 한국을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다행히 회사에서 일정을 조정할 수 있게 돼 입양으로 떠났던 한국 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처음 와본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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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준성씨가 어린시절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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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준성씨가 어린시절 여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사실 지씨는 어렸을 때부터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백인인데 나는 왜 유색인종일까’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지씨는 “캔자스시티 인구가 약 200만명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3분의 2 정도가 백인이고, 제가 사는 곳은 인구가 더 적으니 90% 정도가 백인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학교생활이나 여러 면에서 ‘다른 그’가 살아오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인지 한국에 도착한 지씨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이렇게 많이 사는 곳도 있구나’라며 놀랐습니다.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도 지씨가 살던 곳과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였지만 그곳을 채우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과 외모가 비슷하다는 게 너무도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지씨의 친모의 이름은 지모씨로 돼 있습니다. 아버지의 성을 딴 게 아니라 어머니의 성을 딴 겁니다. 여기까지 추적한 지씨는 또 다른 의문에 빠졌습니다. ‘그럼 내 이름을 지어준 건 누구일까. 엄마일까, 입양기관일까….’ 하지만 아직까지 그 궁금증을 해결할 방법은 없습니다. 3주가량 한국에 머문 지씨는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

사진 = 해외입양인연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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