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엘리펀트>를 봤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총기 난사사건을 다룬 영화다. 영화는 여느 날의 일상과 다르지 않았던 그날의 일상 속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다룬다. 영화적 허구이지만 총기를 난사한 학생은 학교 안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한 교장선생님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다른 애들이 괴롭힘을 당한다고 찾아오면 귀를 기울여라. 자신들처럼 대하지 말라’고. 영화는 ‘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까’를 질문한다. 그리고 나와 다르지 않은 ‘악마’를 마주하게 함으로써 ‘악마’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질문하게 한다.
정말 아이들이 무서워졌다. 가슴이 철렁하고 어떻게 인간이 저런 일을 벌일 수 있을까, 어떻게 아이들이 저렇게 잔혹할 수 있을까 싶다. 인간에 대한 깊은 회의가 들기도 한다. 언론을 통해 만나는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악마와도 같다. 저 악마들만 퇴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인식이 ‘소년법’ 논의의 출발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는 ‘소년법’ 논의를 보면서 본말이 전도됐다고 느낀다. 그들의 주장처럼 아이들은 몸도 마음도 커졌고 어른 뺨칠 만큼 흉악무도하며 제도의 허점을 이용할 줄 알 정도로 영악해졌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도 질 수 있을 것 같다.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책임’ 전에 ‘우리 사회는 그들을 몸도 마음도 어른만큼 커진 존재로 인정했는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
악마가 된 아이들을 탓할 게 아니라 악마를 만들어내는 사회에 대한 성찰이 먼저다. 우리 사회는 그들을 온전히 인간으로 대한 적이 있는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 말대로, 사회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윽박지르지는 않았나? 네가 뭘 안다고, 판단능력이 부족하다고 선거권을 주기에는 아직은 이르다고 하지 않았나? 왜, 무엇이 아이들을 ‘악마’로, ‘괴물’로 만들었는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
이런 질문이 빠진 ‘소년법’ 논의는 헛일이다. 축출, 격리가 답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지금은 내 눈앞에 없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연계되고 만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지만 공동체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출발은 모든 존재에 대한 존중이다. 차별이나 배제, 폭력은 타인에 대한 공포와 적대를 만든다.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이다. 인권이 상식이 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마지막으로 미디어에 호소한다. ‘사건 보도’라는 이름으로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상의 반복 사용이 시청자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 깊이 숙고하길 바란다. 영화 <엘리펀트>는 사건을 끔찍한 방식으로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현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 못지않게 미디어가 끼칠 영향까지를 고려하면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 이 또한 미디어의 사명이다.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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