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슨의 정치역정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절정에 오른 그의 정치력이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민권법을 위해 발휘되었다는 사실이다. 남부연합의 일원이던 텍사스 출신인 그는 1937년 의회에 입성한 후 20년 동안 민권법에 찬성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상원 원내대표가 되자 1957년 민권법을 통과시킨다. 1964년 민권법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수십년 만의 민권 관련 입법이었다.
대통령직 승계 후 더욱 놀라운 장면이 벌어진다. 대통령 취임 후 5일 만인 1963년 11월27일 존슨은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케네디를 진정으로 추모하고 계승하는 방법은 민권법”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케네디가 발의는 했지만 진전은 거의 이루지 못하던 민권법 제정을 단 7개월 만에 완수한다.
의회 연설 전날인 26일 저녁, 존슨의 자택에 모인 참모들은 대통령으로서 하는 첫 연설에서 민권법 이슈를 어떻게 다룰지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남은 임기 동안 의회의 지지를 확보하고 1964년 대선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민권법은 남부를 적으로 돌릴 것이고 어차피 통과될 가능성도 없는 법안이므로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의견을 모았다. 아무리 가치 있는 대의명분이라도 대통령이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힘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말한 측근도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존슨 대통령은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럴 거면 뭐 하려고 대통령을 하는데?”
존슨에 관한 기념비적 전기를 쓴 작가 로버트 카로의 분석은 이렇다. 흔히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얘기를 하는데 ‘권력은 권력자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현실 정치에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런 권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불가피하게 숨겨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권력을 얻을수록 위장은 덜 필요하고 권력의 막이 오르면 권력자의 본질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존슨이다. 상원 원내대표가 되어 결정권이 주어지자 미흡하긴 했지만 그 자리에서 민권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냈다.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지만 일단 대통령직에 오르자 자신이 하려는 더 큰 일을 드러내고 실천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늘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남의 나라 일이지만 남의 일만은 아니다. 해리스와 트럼프는 너무나 대조적인 후보이고 그 결과에 따라 한국에 현실적으로 미칠 영향도 적지 않다. 많은 매체와 사람들이 나름의 근거에 따라 결과를 예측한다.
하지만 미국 대선에 관한 분석들을 접하면 미국 정치에 관한 정보에 앞서 그런 글을 쓰는 매체나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정치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정치인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 미국 정치에 대한 이해도가 아니라 한국의 유권자로서 어떠한지 드러난다. 투표권도 없는 사람들이 미국 대선에 관심과 입장을 갖는 이유는 직접적 이해관계나 단순한 흥밋거리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외국의 일이지만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와 선거를 거기 투영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 대선과 같은 정치 이벤트는, 우리 정치를, 유권자로서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된다. 누가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지가 우선 중요하지만, 과거에 그 선거를 통해 정상에 올랐던 사람들, 오르지 못했던 사람들, 정상에 올랐지만 실패했던 사람들을 돌아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1963년 11월26일 밤에 존슨이 던진 말은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정치와 권력의 본질에 관한 영원한 질문이다. 권력을 가지려는 정치인뿐 아니라 권력의 향방을 결정하는 유권자도 피해갈 수 없는 물음이다. 승패를 베팅하는 흥미로 역사적 대선을 소진하지 말고 한 번은 물어보고 답해볼 일이다. 대통령은 과연 무엇을 위해 하는지, 선출직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제 변화를 만드는 정치인과 ‘사회적 합의’를 내세워 어떤 결정도 하지 않으려는 정치인의 차이는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는 어떤 정치를 하고 만들어갈 것인지.
유정훈 변호사 |
유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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