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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수)

[경주지진 1년] 1년 지나도 지워지지 않은 '지진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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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배낭' 꾸려두고 지진 대비하는 경주시민

"아직도 그날 강한 진동 생각하면 오금 저려"

지난해 9월 12일 규모 5.8 강진 이후 1년 지나

아직도 부서진 채 방치된 기와 지붕 눈에 띄어

관광객들 사이에 남은 불안감…여행업계 타격

제도 개선·교육 강화·문화재 보완 등 개선점도

경북 경주시 노동동에 사는 윤현승(44)씨는 항상 현관 신발장 안에 붉은색 배낭을 가족 수만큼 둔 채 생활하고 있다. 배낭 안에는 생수와 전투식량·통조림·손전등·헬멧·소형라디오 등이 들어 있다. 이른바 '생존 배낭'이다.

윤씨는 "지난해 9월 12일 큰 지진을 겪고 나서부터 생존 배낭을 꾸려 보관하고 있다. 누군가는 '아직도 지진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느냐'고 핀잔을 주는데 언제 지진이 일어날지 모르니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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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대비 비상 배낭에 들어있는 물품들. 지난 4월 14일 롯데백화점 샤롯데 봉사단과 대한적십자사가 진앙지인 경주시 내남면 주민 2500여 명에게 나눠준 재난 대비 비상 가방이다. [사진 독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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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오금이 저린다. 퇴근하고 귀가하는 길 강한 진동(오후 7시44분 5.1 지진)을 느낀 데 이어, 집에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하다 다시 더욱 강력한 진동(오후 8시32분 5.8 지진)을 겪었던 기억이다. 진열장에 있던 물건들이 쏟아지고 스마트폰마저 먹통이 된 상황에서 윤씨는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해 경주시 남남서쪽 8.7㎞ 지역에서 규모 5.8 강진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났다. 이 지진은 1978년 국내에서 계기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강력한 지진이었다.

지진으로 54세대 111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재산 피해액은 경주와 울산, 부산 등 6개 시·도에서 총 110억2000여만원으로 집계됐다. 가장 큰 피해가 생긴 경주시에서만 모두 92억8400만원의 피해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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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12일 발생한 5.8 규모의 지진과 9월 19일 발생한 4.5 규모 여진으로 경북 경주시 첨성대 주변 한옥이 피해를 입었다. 당시 경주시 황남동 한 음식점에서 기와 보수업체 직원들이 건물 지붕의 기와 전체를 교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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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 지진 이후 경주에는 현재까지 633차례의 여진이 이어졌다. 지금 경주시민들은 웬만한 규모의 여진에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지진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언제든 강한 지진이 또 발생할 수 있다'는 경각심이 자리잡았다.

지진의 첫 진앙지였던 경주시 내남면 이동명 부면장은 "언론이 보도하는 것만큼 주민들이 아직까지 불안에 떨며 일상생활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예전과 달리 지금은 언제 어느 곳에서 지진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다"고 전했다.

지진에 대한 불안감은 오히려 외지인들 사이에서 더 심하다. 몸소 지진이 잦아들고 있음을 느끼는 주민들과 달리 외지인들에겐 지난해 9월 12일의 충격이 그대로 남아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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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12일 발생한 지진의 진원지로 알려진 경북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 최충봉(78)ㆍ김한자(71ㆍ여)씨 집은 벽면에 금이 가고 천장에서 비가 새는 등 피해를 입었다. 당시 김한자씨가 지진으로 갈라지며 금이 간 벽면을 가리키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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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평소에는 경주에 연간 100만여명의 수학여행단이 몰려오곤 했지만 지진 후 한 달간 전국 430개 학교 4만7500여명이 숙박을 취소해 숙박업계가 40억원 가까운 손해를 봤다. 올해도 봄에는 학교 30여 곳 5000여 명만이 방문했고 가을에도 비슷한 규모가 될 전망이다.

여전히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진의 흔적은 기와 지붕이다. 아직도 복구를 하지 못했거나 전통 기와가 아닌 함석 기와로 복구를 한 경우가 많아서다. 지진 당시 기와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 주택이 많았다. 당시 전통 기와 한옥 3000여 채 중 1000여 채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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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경주시 내남면의 한 식당 한옥 지붕이 부서진 채 방치돼 있다. 경주시 내남면은 지난해 9월 12일 발생한 5.8 규모 강진의 진앙지다. 경주=김정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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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 한옥이 복구됐지만 아직도 부서진 채 방치된 기와 지붕이 다수 눈에 띄었다. 100㎡ 크기의 한옥 주택 지붕을 수리하는 데는 1만3000여 장의 기와가 드는데 전통 기와 1장의 가격이 1600~2300원대임을 감안하면 수천만원의 복구 비용이 들어 쉽사리 손 대기가 쉽지 않다.

700여 채의 한옥이 있는 경주시 황남동에선 함석 기와가 올려진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함석 기와는 시공 가격이 싸고 내구력이 좋지만 전통 기와와 모양이 달라 전통미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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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한옥보존지구인 경주시 황남동 한 건물의 지붕이 함석 기와로 복구돼 있다. 경주=김정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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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한옥보존지구인 경주시 황남동 한 건물의 지붕이 함석 기와로 복구돼 있다. 경주=김정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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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 이윤정(33·여)씨는 "한옥만이 주는 고즈넉한 매력이 있었는데 지진 이후 곳곳에 함석 기와를 얹은 지붕이 보이니 모델하우스를 지어놓은 듯한 이질감이 들어 아쉽다"고 말했다.

지진을 계기로 개선된 점들도 많다. 지진 대응 체계 개선, 지진 교육 강화, 문화재 보호 체계 보완 등이다.

본래 행정안전부와 기상청으로 나눠 운영되던 긴급재난문자 발송 체계는 기상청으로 일원화됐다. 현재 1분가량 걸리는 문자 전송 시간도 2020년이면 일본 수준인 10초 이내로 줄일 계획이다.

어린이집과 초등학교에서는 지진 대비 교육을 강화했다. 학부모들의 요청이 많아져 지진 대처법, 야외 급식 교육 등 지진에 대응할 수 있는 교육을 확대하면서다. 정부가 2083년까지였던 유치원·초등학교 내진설계 완료 시기도 2034년에 끝내기로 한 것도 어린이 보호를 위한 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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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3일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지진체험장을 찾은 경북 구미시 남구미어린이집 6~7세 원아들이 규모 5.0의 지진상황이 시작되자 황급히 책상 아래로 대피하고 있다. 지난 9월 12일 발생한 규모 5.8 경주 지진으로 지진상황에 대피하는 훈련이 강조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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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는 문화재가 지진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성덕대왕신종 종각에 내진보강 공사를 하고 전시유물에 면진대, 비산방지필름 등을 설치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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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 종각에 대한 내진 보강공사가 이뤄지기 전(왼쪽)과 후 모습. 기둥이 두꺼워지고 테두리에 들보가 설치됐다. [사진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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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관계자는 "9·12 지진은 경주시민들의 생활방식 자체를 바꿀 정도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면서 "복구할 것은 복구하고 개선할 것은 개선해 지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니 관광객들도 안심하고 경주를 다시 찾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경주=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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