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17 (월)

검과 창, 게임 속 냉병기의 존재에 대하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게임의 법칙-46] ◆냉병기, 현실에서 밀려나 게임 안으로

기계와 화약이 등장하면서 고전적인 무기들은 냉병기라는 이름을 얻었다. 화약의 폭발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그냥 병기였던 칼과 창은 반대급부로 차가운 무기라는 이름을 달았다. 냉병기라는 부차적인 명명은 한편으로는 화약에 밀려 전통 무기의 퇴역을 통보받는 일이기도 했다.

매일경제

영화 '인디아나존스' 에서 화려한 검술은 존스의 권총 한 방에 무력화된다. 냉병기의 시대는 그렇게 저물었지만 이후에도 그 상징성은 현실에 계속 남았다./이미지출처=imfdb.org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여러 날붙이 중에서도 병기로 사용되는 냉병기들의 의미는 단순한 도구적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전쟁에 쓰이는 검은 그저 사람을 찌르고 베는 도구적 의미 이상으로 권력 그 자체를 의미했다. 타인과 다른 집단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냉병기들은 현실의 전장에서 화약 병기들의 압도적인 공격력에 밀려버렸지만, 오히려 현실의 전장에서 용도를 상실함으로써 권력을 상징하는 일종의 제식으로 남을 수 있었다. 장성 인사 임명에서 검을 수여하는 모습은 용도를 잃어도 상징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냉병기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현실에서 사라진 냉병기의 용도는 그러나 재미있게도 게임이라는 가상의 국면 안에서는 여전히 살아 숨쉰다. 수많은 고전과 중세시대를 다루는 게임들 속에서 여전히 냉병기는 상대와 나의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그것보다 더욱 강력하고 높은 권위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게임 속의 무기: 생사권력의 작용점으로서

데이터로 의미가 나타나는 게임 안에서 무기들을 표현하는 가장 큰 항목은 역시 공격력이다. 무기를 사용하는 액션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무기가 개별로 존재하는 게임들은 대체로 이 무기로 얼마만큼의 데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와 관련된 데이터를 통해 무기의 본질을 구현한다. 공격력, 공격 속도, 길이와 사정거리를 넘어 구체화될수록 방어구와의 상성관계, 밸런스와 민뎀·맥뎀 등으로 세분화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게임 속 무기의 본질은 날붙이의 절삭력이나 탄환의 물리량이 아닌 공격력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절삭력이라는 도구적 데이터가 아니라 공격력을 중심으로 구현된 무기라는 것은 게임 속에서 무기의 본질이 도구적 속성보다는 주체-타인 간의 공격과 방어라는 생사권력의 수단에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총을 다루는 게임 또한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굳이 냉병기와 화약병기를 구분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그러나 게임 속 냉병기의 존재는 화약병기와 달리 현실에서의 존재감이 무력해졌기에 게임 속 화약병기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매일경제

'디아블로2'(왼쪽) 와 '마비노기'(오른쪽)의 무기 데이터 설명. 게임 안에서 무기는 공격력이라는 현실적 영향력을 중심으로 표현된다.


◆판타지를 위한 검이 아닌 검을 위한 판타지

냉병기는 현실에서는 현실적 용도를 크게 배제당한 채 일종의 제식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도구가 되었다. 현실의 냉병기는 날을 갈지 않은 상태로 사용되고, 게임 안에서는 시퍼렇게 날이 선 채 사용된다는 점은 어찌 보면 재미있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게임은 사실상 냉병기가 유일하게 그 본래적 의미 (타인에게 위해를 가함으로써 권력의 도구로 작동하는)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 되면서 냉병기와 화약병기의 의미를 가르는 장소로 작용하게 된다.

거기에 더해 탄약의 생산과 보급, 정교한 부품의 조립과 유지보수를 위한 공장과 기술, 조직을 필요로 하는 화약병기에 비해 냉병기는 상대적으로 개인의 스탠드 얼론 활용이 용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 지점이 결합하면 게임 속에서 냉병기는 개인이 상대적으로 조직과 기술의 도움 없이도 대단히 강력한 위엄과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는, 그러면서도 현실에서의 안전과는 무관한 새로운 권력감을 선사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으로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중세·판타지 배경과 냉병기의 관계는 판타지나 냉병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냉병기의 위엄을 위해 판타지를 끌어들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판타지를 그리기 위한 도구로 검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검의 활약을 위해 화약병기의 존재를 줄인 배경으로 중세와 판타지가 등장하는 것이다. 꾸준히 쏟아져나오는 랭킹 중심의 서열화에서 쾌감을 만드는 한국형 모바일 롤플레잉 게임들이 냉병기가 활약하는 시대를 선택하는 배경에는 검이라는 냉병기가 갖는 권력의 기제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무리한 이야기인 것일까.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