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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이회창과 3김…애증의 YS, 맞서 싸운 D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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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가까이 한국 정치를 좌우했던 이들이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다. 그래서 ‘3김 정치’란 말도 쓰였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3김들이 정권을 쥐었거나 쥘 무렵 정치를 시작했다. 3김 청산을 내걸고 그들과 맞섰다.

22일 발간된 『이회창 회고록』에서 그는 당시 심경에 대해 “3김의 수레에 올라탔지만, 본격적인 정치의 길을 걷기로 하면서 3김 정치 구도를 타파해야만 우리 정치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주의와 붕당적 권위주의를 청산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그리곤 “3김 정치의 폐막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의미한다”며 “나 스스로는 내가 그 한 축의 세력이 될 것으로 자임하고 있었지만, 상대 축이 새로운 세력의 탄생이란 변화의 이미지를 줄 수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 쪽은 반사적으로 그 반대의 이미지, 즉 변화를 거부하고 대세론에 안주하는 세력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었다. 내 마음속에 스며드는 불안이 바로 이것이었다”고 썼다.

결과적으론 변화의 물결에 3김뿐만 아니라 그 또한 휩쓸려갔다.

그와 YS(김영삼)와는 애증이 교차한다. YS는 그를 정계로 이끌었고 기회를 주었지만 흔들기도 했다. DJ는(김대중)은 말 그대로 정적(政敵)으로 투쟁의 대상이었다. JP(김종필)의 정치생존력에 대한 그의 평가는 박하다. 3김에 대한 이 전 총재의 술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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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1993년 8월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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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YS=YS는 대통령 시절 이 전 총재에게 최소 다섯 자리를 제안했다. 감사원장·대법원장·국무총리와 여당 선대위의장와 당 대표다. 대법원장만 YS가 번복했을 뿐이다. 둘의 관계는 그러는 동안 요동쳤다. 그는 법이 규정한 권한을 행사한다고 봤고 YS와 그 주변은 월권 한다고 여겨서였다.

1993년 대법관이던 그가 YS가 감사원장직을 제안하면서 만났다. 당시 YS를 두곤 “나는 그날 그의 말을 듣고 허풍이 아니라 기성 정치인에게서는 보기 드문 이상주의자의 풍모를 발견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략) 그는 동물 같은 정치적 후각을 가졌으면서도 약간의 이상주의자적 면모도 아울러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감사원장직 수락에 대해선 “이 결단은 나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이 결단으로 나는 김영삼이라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주역인 한 사람과 참으로 굴곡 많고 애증이 엇갈리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라고 썼다.

실제 둘은 엇갈리곤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게 1994년 국무총리직 사퇴 과정이다. 이 전 총재는 127일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 총리 참석 여부를 두고 YS와 정면 충돌했다. YS는 이후 회고록을 통해 “이 전 총재가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 전 총재는 그러나 당시 YS와의 청와대 회동을 두고 “내 말이 끝나자 대통령이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며 ‘이 총리는 어느 나라 총리냐’고 했다. 순간 나는 그가 밖에서 들리도록 일부러 큰 소리를 내는 것 같이 느껴져 나도 덩달라 큰소리로 대통령에게 말했다”며 “내가 끝내 사과를 안 하자 그는 마침내 ‘이러한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책임이 없느냐’고 했다. 나와 대통령과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길목에 이르렀다고 생각되어 대통령에게 ‘그렇다면 내가 그만두겠다’고 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YS 회고록에 대해선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당시 청와대발 주장을 두곤 “전혀 근거 없는 쓰레기 같은 중상모략”이라고도 했다.

둘은 이 같은 갈등을 반복했다. 1997년 이 전 총재가 YS에게 전두환·노태우 사면을 요구한 회동을 두고 YS는 회고록에 “나는 화를 냈다”고 썼지만 이 전 총재는 “화기애애할 정도까진 아니어도 와인까지 나눠마셨다”고 기억했다. 둘은 이후 DJ 비자금 수사를 YS 지시로 유보하게 된 것을 두고도 이 전 총재는 “하필이면 내가 국회에서 대표연설하는 중 수사중단이 발표됐다. 집권당의 대선 후보를 떨어뜨릴 생각이 아니라면 그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중단시키는 배려는 보였어야 했다”고 적었다.

2000년 대 들어 이 전 총재가 당권을 쥔 후엔 YS가 종종 이 전 총재는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 이 전 총재는 회고록에 “YS의 일은 한나라당으로선 계륵 같은 골칫거리였다”며 “일도양단으로 잘라내자니 YS를 추종하는 당내 민주계와 부산지역 민심의 향배도 무시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YS 정부 자체에 대해선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율곡사업 등 군 무기사업 비리 ^군부대 파벌 척결 등을 거론하며 “10년 좌파 정권보다 개혁을 잘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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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김대중 당시 국민 회의 총재(왼쪽)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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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DJ와 JP=이 전 총재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DJ 쪽에서 이종찬·정대철·이해찬 등이 개별적으로 야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할 뜻을 타진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신한국당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엔 DJ와는 충돌의 연속이었다. 회고록에서 DJ를 묘사하는 단어는 ‘거짓’‘위선’ 등의 단어를 썼다. 그는 “당선 직후 한나라당 당사를 찾아와 웃던 그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너무나 매몰찼다”며 DJ 정권이 들어선 이후 자신과 야당이 탄압받았다는 얘기를 했다.

총풍·세풍과 ‘의원 빼가기’ 등을 거론하며 “과거 군사정권 시대엔 말을 잘 듣지 않느다고 정치인을 중앙정보부로 함부로 끌고가던 시절이 있었다면 DJ정권은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이란 합법적 수단을 동원한 것이 다를 뿐 불공정한 야당 탕압과 정치보복을 자행한 것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며 “즉 야당이 여권에 비협조적이란 이유로 적대시하고 토멸 대상으로 삼는데는 과거 정권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검찰을 향해선 ‘정치검찰’이라고 했다. 그는 “대통령이 민주화투쟁했다고 민주화 정권은 아니다”라고 썼다.

그는 JP에 대해선 “젊은 시절 풍운아였고 정열과 배짱 그리고 높은 문화적 감각까지 갖춘 매력적인 인물이었다”며 “3김 정치 구도에서 그는 상황에 따라 정치공학적으로 합종과 연횡을 구사하는 정치인으로 비춰졌다. 정치 고수의 신묘한 현란한 정치기술이라고 말할 지 모르겠지만 아마추어인 나의 눈에는 도무지 신뢰하기 어려운 상대로 비쳤다”고 했다.

DJP연합을 두고도 “DJP연합은 야합이지만 선거에 이기는 신묘한 수임은 틀림없고 나는 완벽하게 패한 것”이라면서도 “두 사람을 성공한 정치인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말했다. “DJP 연합으로 탄생한 김대중 정권이 대한민국에 과연 무슨 기여를 했나”라며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 이른바 진보정권·좌파정권이 잘못된 남북관계 설정으로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는 데 일조했다”고 했다. 이어 “DJ정권은 결코 성공한 정권으로 볼 수 없다”며 “반세기 만에 진보·좌파 정권을 쥐어본 국민에게 무능함과 무책임함만을 각인시켜줬다”고 말했다.

이 전 총재는 다만 DJ와의 총재 회담에 대해선 평가했다. “7차례 단독 회담을 했고 (우리 당 대변인이) '칠회칠배'(七會七背)란 논평을 할 정도로 그때마다 뒤통수를 쳤다”며 “여야가 싸울 때 싸우더라도 대통령과의 회합은 정국을 푸는 가장 확실한 해법이고 서로 소통하면서 나랏일을 걱정하고 상의하는 모습 자체가 국민을 안심시킨다”고 했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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