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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양해원의 말글 탐험] [46] "훈련병, 양말 신습니다"가 명령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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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양해원 글지기 대표


"우리 삼촌 경찰이야 너~." 동네 조무래기들 입씨름은 이 한마디로 얼추 가라앉곤 했다. 한데 경찰의 조카를 찍소리 못하게 하는 녀석이 있었으니…. "우리 사촌형은 군인인데?" '민-관-군(民官軍)'이 아니라 '군-관-민' 하던 시절 얘기다. 그 형, 높아야 소위(少尉)쯤이었으리라.

하물며 별이 넷이면 예나 지금이나 까마득하다. 그런 대장(大將) 부부가 병사를 수족 부리듯 한들 꿈틀댈 수나 있었을까. 이른바 '공관병(公館兵) 갑질 사건'. 굳이 따지면 '공관병' 뒤에 '~을 상대로 한'이라는 표현이 빠져 마치 공관병이 부당한 짓을 했다는 말처럼 보인다. 아무튼 세간에 알려진 대로 온갖 궂은일 시키고 인격을 깔아뭉갰다면 갑질이라기보다는 '실랑이질'이나 '학대(虐待)'라 해야 옳겠다.

군대에서는 병사뿐 아니라 우리말도 이런 실랑이질을 당한다. 연예인들의 훈련소 체험 TV 프로그램을 보자. 저녁 점호(點呼) 시간, 개그맨 박명수가 보고한답시고 실내화를 신었다. 무사히 넘어갈 리가. "누가 슬리퍼 신고 보고합니까 훈련병?" 당황한 박명수, 맨발에 운동화를 꿰려 한다. "훈련병, 양말 신습니다." 양말 한 짝도 참 오래 걸린다. 기어코 또 불호령. "훈련병, 동작 신속하게 합니다."

물론 교관은 '양말을 신어라' '빨리 움직여라' 하는 뜻으로 말했다. 한데 문법상으로는 '훈련병이 양말을 신는다/움직임이 빠르다'는 뜻이 돼버렸다. 'ㅂ니다'는 어떤 동작이나 상태를 그대로 나타낼 뿐, 상대방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시험 보는 아이가 일찍 깨워달라는 뜻으로 "엄마, 내일 일찍 깨워줍니다" 한 꼴이다. 내용은 명령문(命令文)인데 형식은 평서문(平敍文)…. '요'(하세요)를 쓰지 못하고 '다-나-까'(한다/하나/합니까)만 써야 한다는 굴레가 우리말을 이렇게 망가뜨려서야.

하급자 못살게 구는 악습도, 우리말 뒤트는 폐습도 바로잡을 일이다. 안 그래도 북한 때문에 뒤숭숭한 군(軍), 부디 힘내기를….

[양해원 글지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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