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 공작원으로 체포돼 29년 구금
노환·지병 견디며 임대아파트 생활
“삶의 기록 자식에게 전하고 싶어”
광주 시민단체, 송환 운동 첫발
29년 동안 감옥에서 보냈던 장기수 서옥렬(90)씨가 지난 21일 광주광역시 동구 한 찻집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
“죽기 전에 한번 가족들을 만나고 싶지…”
감옥에서 29년을 보낸 장기수 서옥렬(90)씨는 22일 아침 <한겨레>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담담한 목소리로 “이번에는 꼭 가고 싶어”라고 말했다. 광주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생활하는 그는 두 달여 만에 퇴원했다. 심장병과 노환이 겹쳐 한때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부엌살림은 작은 냉장고와 1인용 밥솥, 몇 개의 그릇 등이 전부다. 안방 상 위엔 잡지와 책들이 놓여 있고, 약봉지들이 흩어져 있다. 책장엔 일본어판 경제학·철학 관련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그의 삶은 남과 북을 오간 세월로 엮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전남 신안군 팔금도에서 1녀5남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고려대 경제학과 재학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을 만나 북한 인민군에 입대해 북으로 갔다. 1953년 11월 제대해 북한 쪽인 강원도 천내군 중학교에서 교원 생활을 하면서 운명처럼 만난 ‘여성 교원’과 결혼했다. 1955년 12월 김일성대에 들어가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뒤 평양의 한 간부양성소에서 일했다.
남쪽으로 온 것은 1961년 8월이다. 공작원으로 남파됐을 때, 북한에 두고 온 두 아이는 5살(56년생), 3살(58년생)이었다. 남파 목적은 고향 집을 방문해 동생들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북으로 가려던 그는 당국에 체포됐다.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기소된 그는 1심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뒤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최종 확정됐다.
이후 남쪽에서 보낸 시간이 올해로 56년이다. 1998년에 쓰고도 부치지 못했던 편지엔 아내를 향한 애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여보! 당신, 지금 살아 있는 거요? 내가 떠나올 때 당신은 병원에 들어가 있었기에 만나보지도 못하고 떠났었는데, 살아있는지 궁금하기 그지없구려.” 서씨는 “결혼식 올렸던 그 날이 지금도 내 뇌리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나를 항상 추슬러 주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10여년 전 아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 독일 교포가 세상을 뜬 뒤부턴 아내의 생사도 모른다.
‘고독한 그리움’을 버티게 해 준 것은 공부였다. 일본어에 능통하고 영어와 러시아어, 중국어 등 5개 국어를 한다. 감옥에서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출소 뒤 <정치경제학의 기본>이라는 책을 썼다. 남쪽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토막일지>도 10여권이나 된다. 칼 마르크스의 독일어판 <다스 카피탈(자본)>을 읽기 시작했던 일(96.7.22)이나 <러시아어 회화>를 공부하기 시작한 기억(97년 3월3일) 등을 꼼꼼하게 적어뒀다. 그는 “내가 살아온 기록들을 자식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서씨는 2000년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갈 때 가지 못했다. 1990년 가석방 당시 반강제로 직인을 찍은 준법서약서가 북송을 막는 걸림돌이 됐다. 이미 남쪽으로 전향을 해 ‘비전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쓴 건 전향서가 아니라, ‘나가서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라고 말했다.
6·15 공동선언실천위원회 광주본부 등은 25일 광주시 동구 와이엠시에이 백제실에서 ‘장기 구금 양심수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준)’ 대표자 회의 결성 기자회견을 연다. 1992년 대학신문 기자 때 만나 인연을 이어온 정경미(46)씨는 “처절하고 치열하게, 소박하고 외롭게 살아오신 선생님이 북쪽 가족들을 살아 생전 만나실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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