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7월6일 한반도 평화구축과 남북관계, 통일 등을 주제로 ‘베를린 구상’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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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등장 이후에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계속되고 있다. 예상보다 빨랐던 한-미 정상회담 직후 이뤄진 북한의 야속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에도 문재인 정부는 ‘베를린 구상’을 공개하고 첫 후속 조처로 군사회담과 적십자회담을 동시 제안했다. 문 정부 출범 이후 7월19일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가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기까지 70여 일 동안 발생한 일만 놓고 보면 2년은 훌쩍 지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새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탄식이 절로 나오고,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만큼 새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선 기대와 걱정이 교차한다. 지금껏 잘해온 것은 박수를 쳐주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지난 정부 9년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무엇을 어찌해도 그보다 더 못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꽉 막힌 남북관계를 풀고 북핵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찾으려면 새 그림을 그려야 하지만 한반도가 놓인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다. 대북정책에 진정한 의미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어린 시절 과자 종합선물세트라는 것이 있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과자·사탕·껌 등 다양한 아이템을 하나의 박스에 담은 것인데 요즘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추억의 상품이다. 간식거리가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 이 선물은 아이들에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을 안겨주었다.
베를린 구상은 종합선물세트…, 하지만
지난 7월6일 문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에서 ‘한반도 평화구상’, 이른바 ‘베를린 구상’을 밝혔다. ‘베를린 구상’은 종합선물 같은 여러 내용을 담고 있다. 내용이 넘치는 만큼 많은 고민이 배어 있고, 어느 일방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신중함과 균형감이 녹아 있다. 대북정책이니 당연히 북한을 고려했을 것이다. 여기에 미국도 살피고 강경한 보수 성향의 국민들과 여론도 생각한 듯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 ‘퍼주기 논란’을 우려한 듯한 정치적 계산과 고려가 관찰되기 때문이다.
내용물만 놓고 보면 이보다 더 실할 수 없다. 큰 아이템으로는 북한의 ICBM 발사를 비판하며 더욱 강한 압박을 하면서도 ‘대화를 통한 평화’ 원칙을 분명히 했다. 북한 체제를 보장하는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추구하겠다고 했고, 한반도에 새로운 경제 지도를 그리고 비정치적 교류협력 사업은 중단 없이 지속하겠다는 의지도 넣었다. 작은 덩어리로 이산가족 상봉 같은 인도적 문제와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 군사분계선에 적대행위 중단도 담았다. 이 모든 것을 위해 남북대화가 필요하며 정상회담은 덤으로 선사했다. 거기에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노력을 계승하겠다는 예쁜 포장지를 더했다.
‘베를린 구상’은 어쩌면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지금까지 우리가 얘기해왔고 또 상상 가능한 범위에 있는 대북정책의 종합선물세트이다. 그러나 종합선물세트를 받는 대상은 미국도 한국 내 보수도 아닌 북한이다. 북한이 종합선물세트를 받고 놀라게 하려면 기존 것들의 답습이 아닌 새로운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베를린 구상’이 단순히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대한 추억의 종합선물세트라면 지금의 북한을 유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햇볕정책 키즈는 어디에
얼마 전 72회 LPGA US여자오픈에서 한국선수가 우승했다. 지난 10년 동안 7차례 우승이다. 이들을 ‘박세리 키즈’라고 한다. 1998년 물웅덩이 주변에 떨어진 공을 맞추기 위해 양말을 벗고 샷을 해 우승한 박세리를 보고 꿈을 키운 세대다. 명실상부 ‘박세리 키즈’들이 세계 여자 골프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도 북한은 미사일 개발을 멈추지 않으며 결국 ICBM까지 시험 발사했다. 우리 정부는 북한이 ICBM까지 발사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는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현실 인식보다 기대감이 앞선 듯하다. 사실 북한의 ICBM 발사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북한은 ICBM을 쏜다’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고 대북정책의 밑그림을 그렸다.
이는 ‘베를린 구상’에도 그대로 반영돼 나타났다. 그로 인해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키려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권의 기대감으로 북한이 도발을 자제할 것이라는 희망과 자기최면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이 필요하다. ICBM 발사에 대한 대응 준비 부족으로 인해 대화로 국면의 전환을 시도하는 게 더 어려운 상황이 됐다.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노력을 계승한다고 하지만 그때와 지금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특히 북핵 문제는 6자회담을 통해 2005년 ‘9·19 공동성명’과 2007년 ‘2·13 합의’ ‘10·3 합의’가 이뤄진 시기와 비교해 더 엄중하고 복잡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동결을 입구로 한 단계적 해결’은 1994년 ‘제네바 합의’ 때 이미 나온 이야기이다. 우린 ‘2·13 합의’ ‘10·3 합의’를 통해 이미 ‘폐쇄·봉인’ ‘불능화’라는 더 세부적인 단계적 접근법을 경험한 바 있다. ‘9·19 공동성명’엔 이미 비핵화를 위한 평화체제 구상이 담겨 있고 경제협력 역시 10년도 넘은 이야기이다.
북핵 능력 고도화에 따라 동결-비핵화라는 단계론만으로 북핵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다. 김정은 시기 북한이 핵을 가지려는 근본적 의도와 목적은 당면한 안보 우려 해소와 위협 제거만이 아니다. 이들은 체제 생존과 정권의 영속화를 생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북핵 문제는 북한 체제의 현재를 넘어 미래를 포함하고 있다.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이제 더 이상 맞교환이 가능한 등가가 될 수 없다.
누가 대통령에게 동결을 조건화하고 평화체제를 만병통치약으로 이야기하는지 자못 궁금하다. 현재 북한과 주변 안보 상황의 변화를 정확히 이해·분석·평가하지 못하고 여전히 10년 전 시간 속에서 추억의 종합선물세트를 그리워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9년 전 닫혀 있던 캐비닛을 열어 먼지 쌓인 대북정책을 꺼내어놓은 것일 수도 있다. 새 정부의 안보라인에 지난 9년 동안 오늘을 준비하고 실력을 닦아온 ‘햇볕정책 키즈’가 보이지 않는다.
북핵 문제 이제는 의지 아닌 역량
오래전 신혼여행 때 차를 빌려 프랑스, 스위스, 독일을 돌았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운전대는 내가 잡았지만 여행 내내 주도권은 옆에서 열심히 지도를 본 아내가 쥐고 있었다. 꼭 운전대를 잡는다고 주도권을 쥐는 것은 아니다.
지난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 양국이 제재는 외교적 수단이며 평화적인 방식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한다는 큰 방향에 합의했다. 그러나 현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최대 압박과 관여’라는 제재와 대화를 병행하는 모순된 비핵화 전략에 한국 정부가 동조하는 형세다. 남북관계보다 한-미 관계를 우선하는 것일 수도 있고, 먼저 미국을 설득하는 게 필요하다는 전략적 판단에 의한 계산된 행동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우리 정부는 미국에서 남북관계 개선의 중요성에 대한 동의를 끌어내는 것과 동시에, 한반도 문제에선 한국의 주도권을 확인하고 운전석에 앉겠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으로 북한을 유인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 정부는 압박 속에서도 대화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 준비가 덜된 상황에서 여전히 최대 압박 후에 북한의 변화를 기다린다는 입장이다. 즉, 대화보다는 압박에 방점을 찍고 있다.
우리가 주도권을 쥐기 위해선 북핵 문제의 구체적 해결 방안과 이를 추진할 역량을 갖춰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정교한 한국형 로드맵, 즉 ‘신 페리프로세스’가 필요하다. 북한의 핵능력을 과거(이미 만들어놓은 핵탄두), 현재(핵시설, 핵분열 물질의 양적 증가), 미래(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 등 핵과 미사일 능력의 고도화와 질적 향상) 등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선 미래(핵의 유예), 현재(핵의 동결과 불능화), 과거(핵의 완전 폐기) 등 단계별 검증을 해야 한다. 이에 맞춰 북한이 느끼는 과거(제재), 현재(불가침, 평화체제), 미래(체제보장)의 안보 우려를 제거하는 다원적(6자회담을 통해 비핵화 추진-남북과 미·중을 포함하는 4자의 평화대화 진행-남북·북미 간 양자 대화 지속)이고 포괄적(안보-경제) 로드맵 작성이 요구된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군사회담과 적십자회담 제의에 미국은 미덥지 않다는 냉소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운전석’에 앉기 위해서는 한반도 문제와 북핵 게임의 주요 행위자로서 지위를 확보하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운전석에 남과 북이 함께 앉아야 한다. 한반도의 ‘운전석’에 앉기 위해서는 북핵 문제를 비롯해 한반도 문제와 통일의 주체가 남과 북이라는 점과 한반도의 운명 역시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가 지속되고 문재인 정부가 지난 2개월간 보여온 대북정책 기조를 유지할 경우, 남북관계는 지난 9년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북한이 비핵화하면 크게 도와주겠다’ ‘북한이 핵미사일을 도발하지 않으면 대화하겠다’는 전제 조건을 내건 대화론은 북한이 비핵화하면 적극적으로 도와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 구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대화에는 조건이 필요 없다. 여건이 조성되어야만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역시 오바마 행정부 시절 ‘전략적 인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의 용인이나 중국, 국제사회의 협조를 통해 북한을 압박하는 것으로 북한을 대화로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80% 이상의 지지율에도 국내 정치적 상황 탓에 주저하고 계산한다면 앞으로 또 다른 기회는 없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대북정책은 국내 정치나 국제사회에 대한 고려보다 대통령의 의지와 결단을 통해 더 대담한 모험적 접근법이 필요하다. 남북대화를 선행하면서 미·중이나 국제사회를 설득하는 모험적 대북전략과 대담한 접근만이 대전환을 이끌어낼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이 2000년 제1차 남북 정상회담으로 이어졌고, 60여 년간 대립하고 갈등해온 남북이 화해와 협력의 길로 들어선 것도 모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울에 가면 북한을 왜 그렇게 이상하게만 이야기하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2년 전 중앙아시아의 한 국가를 방문했을 때 만난 고려인 한 분의 이야기다. 서울과 평양을 모두 오갈 수 있는 신분이라 그에게서 서울과 평양 방문 경험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재외 한인을 대상으로 한 통일 프로그램에 참가한 이후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했다. 재외동포들을 불러놓고 좋지 못한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실망스럽다고까지 했다. 북한 흉보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이 외국에 나가서 “북한 혼내주세요”라고 이 나라 저 나라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가슴 아프다고 했다. 특히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 북한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더 신중해야 한다며 한국 가면 꼭 전해달라던 그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대화에는 조건이 필요 없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베를린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우선 아무런 조건 없이 만나서 듣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북한이 고민을 이야기한다면 가슴을 열고 듣겠습니다. 국제사회가 우려하는 바는 분명 전하겠습니다. 북한이 듣기 싫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더더욱 얼굴을 마주 보고 당당히 하겠습니다. 만나서 북한이 더 이상 핵과 미사일을 고도화하지 않도록 설득하여 유예와 동결의 약속을 받아내고 불능화, 비핵화의 길로 갈 수 있는 대문을 열겠습니다. 남북관계의 조건 없는 만남이 비핵화를 위한 입구이자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국제사회의 평화를 위한 출발점입니다. 국제사회는 한반도의 주인인 남과 북의 만남에 응원을 보내주십시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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