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아시아경제 이지은 기자]"부총리 직함은 가지고 있지만,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김진표 선배(국정기획자문위원장ㆍ행시 13회), 이용섭 선배(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ㆍ행시 14회)같은 실세들 사이에서 실제로 대통령과 자주 대면하면서 보고드리고, 잘 헤쳐나갈지 걱정된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행시 26회)의 인사청문회가 진행된 지난달 7일 김광림 자유한국당 의원은 "돈ㆍ학벌ㆍ인맥 없이 이 자리까지 왔다"며 진심을 담은 격려의 말과 함께 이같은 '뼈 있는 충고'를 건넸다. 김 의원은 김 부총리가 사무관이던 시절 직속상관이었다. 김 의원은 대통령의 측근과 실세들이 청와대와 정부에 대거 포진한 상태에서 경제부총리의 발언권이 약화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그로부터 45일이 지났다. 김 의원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경제정책, 특히 조세 부문에서 김 부총리의 목소리가 사라져가고 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증세 없는' 100대 과제를 제시한 지 하루만인 지난 19일, 정부 일각과 여당에서 증세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포문을 연 건 과제 발표 당사자인 김진표 국정기획위원장이었다. 그는 이날 오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나라가 제 기능을 하고 경제ㆍ사회에서 부족한 부분을 잡으려면 단계적으로 조세 부담을 올려야 한다"며 소득세ㆍ법인세 인상을 언급했다.
소득세ㆍ법인세 인상은 대선 공약에 포함됐지만 100대 과제에서는 빠졌다. 정권 초기 개혁적 정책들이 잇따라 추진되며 피로감이 누적되는 가운데, 증세가 자칫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을 흔들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부총리도 지난 12일 기자들과 만나 "이번 세법개정안에 명목세율 인상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올해는 증세가 없을 것'이란 예상이 지난주까지만 해도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김 위원장 발언으로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은 건 경제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한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이었다. 그는 회의가 비공개로 전환되기 직전, "재정당국에서 내놓은 재원 조달방안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며 "해내지도 못하는 지하경제 양성화 말고, 소득세율 조정 등 증세 문제에 대해 국민 토론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 추가적으로 네 명의 발언자가 증세를 찬성한다고 밝혔다.
오후에 진행된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는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비과세 감면과 실효세율만으로는 세입 목표 달성이 어렵다며 "2000억원 초과 대기업에 대해 과표를 신설해 25%로 적용하고, 현행 40%인 5억원 초과 고소득자의 소득세율도 42%로 높이자"고 제안했다.
국가재정전략회의 논의 내용이 곧 발표될 세법개정안에도 반영될 수 있는 만큼, 일주일 전 부총리가 '명목세율 인상은 없다'고 단언한 것을 무색하게 한다.
사전에 미리 입을 맞춘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증세 발언이 터져나오는 동안, 경제사령탑인 김 부총리는 침묵했다. 김 장관의 증세 발언에도 '민감한 문제'라며 즉답을 피했다. 기재부 차원의 입장 표명 역시 없었다.
정치인들의 입김에 경제정책을 이끌고 갈 부총리의 존재감이 완전히 묻힌 모양새다. 관가에서는 "청와대와 여당이 정책을 수립하고 경제부총리는 뒤치다꺼리나 하는 존재로 각인될까 두렵다. 정치가 경제를 휘두르는 기형적 구조는 부작용을 낳을 공산이 크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지은 기자 leez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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