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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목)

김기춘 "망한 왕조의 도승지…사약 받고 깨끗이 끝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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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블랙리스트' 작성 및 관리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2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3차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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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78)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28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까지 된 데에 "정치적 책임을 통감한다"며 "재판할 것도 없이 독배를 내리면 깨끗이 마시고 이 상황을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김 전 실장은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재판장 황병헌) 심리로 진행된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 재판에서 피고인 신문 도중 이같이 말했다.

김 전 실장은 "제가 모시던 대통령이 탄핵받고 구속까지 됐는데, 비서실장이 잘 보좌했더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 하는 정치적 책임을 통감한다"라고 말했다.

특검 측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잘못 보좌했다는 것이냐"고 묻자 그는 "과거 왕조 시대에서 망한 정권이나 왕조의 도승지(조선 시대 왕의 비서실장 격)를 했으면 사약을 받지 않았는가"라며 "탄핵받고 완전히 무너진 대통령을 제가 보좌했는데, 가능하다면 재판할 것도 없이 '사약을 받으라'며 독배를 들이밀면 깨끗이 마시고 끝내고 싶다"고 답했다.

이어 "이 정치적 사건을 형법 틀에 넣어 맞추려니 수많은 증인이 오가고 재판관들에게도 큰 폐를 끼치고 있다"며 "그런 점에서 무너진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을 했다는 자체에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이에 특검팀은 재차 "'문화계 블랙리스트' 재판에 대해서는 전혀 잘못한 바 없고, 단지 대통령을 잘못 보좌했다는 취지로 이해하면 되는가"라고 물었다. 김 전 실장은 "그런 취지로 이해하면 된다"며 "제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 무슨 명단을 주거니 받거니 해서 배제된 분이 있다는데, 원칙을 갖고 일했으면 이런 문제는 안 생겼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블랙리스트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문체부 공무원들에게 사표를 받는 등 인사상 불이익을 준 혐의에 대해서도 부인했다.

다만 "어차피 정부에서 줄 보조금이나 예산은 한정돼 있는데 신청자는 많으면 누군가는 배제되고 지원금이 삭감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아니냐"며 "말단 직원들이 자기 나름의 기준을 갖고 삭감한 게 과연 범죄인지는 의문"이라고 주장했다.

김 전 실장은 자신의 변호인단이 건강 문제를 거론하자 "우리 심장이 주먹만 한데 거기에 금속 그물망이 8개가 꽂혀 있어 상당히 위중하다"며 "매일 자기 전에 '오늘 하루 살아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한다. 매일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란 생각으로 생활한다"고 울먹였다.

김 전 실장은 변호인이 "재판부에 할 말이 있느냐"고 묻자 떨리는 목소리로 "제 소망은 언제가 됐든 옥사 안 하고 밖에 나가서 죽었으면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 전 실장을 지지하던 일부 중년 방청객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들은 피고인신문이 끝난 이후 김 전 실장에게 "힘내세요"라고 외쳤다가 법정 경위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김 전 실장은 재판부에 건강 악화를 이유로 보석을 청구한 상태다.

[권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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