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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이윤택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가 잊고 있던 저항정신 일깨워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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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블랙리스트 1호’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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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5월26일 서울 명륜동 ‘30 스튜디오’에서 한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저항정신을 일깨워줬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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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50년 친구’ 연극인
“노무현 정신 잇되 노무현과 다른 길 가라”


1986년 34살의 나이에 신문기자를 그만두고 연극판에 뛰어든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고향 부산에서 단원들이 함께 먹고 자는 연극공동체인 ‘연희단거리패’를 만들고, ‘가마골소극장’을 열었다. 이윤택(65)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30여년 연극 인생의 출발이었다. ‘산씻김’ 등 우리 전통 굿의 신명을 바탕으로 한 실험극들을 들고 서울로 진출한 그는 안온한 분위기에 젖어 있던 ‘성안 사람들’을 흔들었다. 2004년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맡는 등 그는 마침내 대한민국의 대표적 연극인 중 한명이 됐다. 그는 늘 문화적 무정부주의자, 회색분자를 자처했다. 하지만 그에게 박근혜 정부는 ‘블랙리스트 1호’란 딱지를 붙였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항쟁 시기에도 “문화로 싸웠다”는 연극쟁이 이윤택 예술감독을 지난달 26일 서울 명륜동 ‘30 스튜디오’에서 만나, 블랙리스트와 새 정부의 문화정책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이 예술감독은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신은 이어받더라도 노무현과 다른 길을 가야 한다”며 “문화에 대해서는 지원만 하고 간섭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했다.

글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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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5월26일 서울 명륜동 ‘30 스튜디오’에서 한 <한겨레>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저항정신을 일깨워줬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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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들이 ‘소’자 떼고 깨어있는 시민 됐잖아요

▶ 평생 연극을 해온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1호’였습니다. 이에 반발해 그는 지난겨울 광화문 광장에 연극을 올리는 등 저항의 촛불을 들었습니다. 평생 문화적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했던 그가 변한 걸까요? 그는 자신이 아니라 시대가 변했다고 답했습니다. 촛불 명예혁명에서 보듯 이제는 소시민이 아닌 깨어 있는 시민들이 주체인 시대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시민문화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 감독을 지난 5월26일 서울 명륜동 ‘30 스튜디오’에서 만났습니다.

“지난겨울 광장의 촛불은
시민의 비폭력적 명예혁명”
“군대 나서라는 극우 선동
극좌 운동논리도 안 통해”

“보수 붕괴로 진보도 변할 것
공존·상생의 하나됨 철학 필요”
“문재인 정부 성공 위해선
노무현 정신 잇되 다른길 가야”


이윤택(65)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을 만나기로 한 장소인 ‘30 스튜디오’는 서울 성균관대학교 부근의 주택가 골목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창경궁 담벼락에 기대앉은 건물이다. 본거지가 처음에는 대학로에, 다음에는 혜화로터리 부근에 자리잡았다가 지난해 이곳으로 옮겼다. 가난한 연극쟁이들의 현실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이윤택(이하 호칭 생략)은 씩씩했다. 주눅들기는커녕 연극의 저항정신을 강조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나?

“주로 부산에 있다. 4년 전에 문을 닫았던 부산 가마골소극장을 다시 짓고 있다. 7월에 개관을 하면 거기에 주로 머물 계획이다.”

-서울 생활은 완전히 정리한건가?

“대학로의 게릴라극장과 수유리에 있던 연희단거리패 단원 숙소를 다 정리했다. 서울에는 ‘30 스튜디오’만 남았는데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가 맡았다. 개인적으로는 서울 시대를 마감했다. 1994년 ‘우리극연구소’를 만들면서 서울에 본격적으로 정착했으니까 23년 만의 완전한 귀향인 셈이다.”

이윤택은 1986년 고향인 부산에서 연극 인생을 시작했다. 그해 1월 6년여 동안의 기자 생활(부산일보)을 접고 10여년 만에 연극판에 다시 돌아왔다. 그때가 서른다섯이었다. 복귀 석달 만인 그해 4월 동해안 별신굿을 무대에 올려 성공했다. 이어 그는 같이 먹고 함께 생활하는 연극집단인 ‘연희단거리패’를 만들고, 퇴직금 660만원을 털어 광복동에 연희단거리패의 둥지인 ‘가마골소극장’을 열었다. 씻김굿을 소재로 한 <산씻김> 등 이윤택이 올린 연극들은 부산에서 호평을 받았다. 자신감을 얻은 이윤택은 1988년 <산씻김>을 들고 처음으로 서울 나들이 공연을 했다. 이어 <시민 K(케이)>(1989년), <오구>(1990년), <바보각시>(1993년) 등을 들고 서울에 나타났다. 1994년 서울 대학로에 배우 양성소인 우리극연구소를 만들었고, 2004년에는 게릴라극장(2006년 혜화동으로 이전)을 열었다. 대관료를 받지 않고 입장료 수입의 절반만 받았기에 게릴라극장은 작은 극단들의 메카였다. 하지만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게릴라극장에 대한 정부 지원금은 완전히 끊겼다.

“혁명가 숨겨주는 신부가 문재인”

-과거 어느 인터뷰에서 “성안 사람들을 흔들겠다”고 말한 적이 있더라. 이제 성안인 서울을 떠나 성 밖의 변방으로 다시 나가는데 임무가 끝난 것인가?

“그렇다. 시인 기형도가 생전에 <문예중앙>에 기사를 쓰면서 ‘문학 무정부주의자 이윤택, 게릴라주의로 서울에 입성하다’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 문화 게릴라라는 단어가 좋았다. 거대한 적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게릴라 말이다. 그러나 게릴라 시대는 끝났다. 왜냐하면 게릴라는 적이 있어야 하는데 가장 강력한 제도권을 형성한 보수가 무너졌다. 따라서 게릴라가 필요 없고, 게릴라 짓을 해도 안 된다. 이제 원래의 길로 가려고 한다. 나는 변방인이다. 체질적으로 모든 생각이 변방에서 출발했기에 변방인 내 고향으로 간다.”

-보수가 무너진 게 아니라 박근혜 정권이 무너진 거 아닌가?

“나는 구조적인 변화라고 본다. 이번 광화문 촛불혁명과 대선은 우리나라 보수의 붕괴를 보여준다. 막말하고 상식이 없는데다 너무 야만적이고 무식한 작태를 스스로 노출했기 때문에 보수가 그냥 무너졌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출범으로 기존 보수는 더 희망이 없다고 본다.”

-무슨 뜻인가?

“문재인과 노무현 정부는 큰 차이가 있다. 노무현 정부는 철저한 진영논리에서 움직였다. 그때는 반대쪽에 보수라는 큰 힘이 있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진보 진영의 정부가 아니다. 2012년 대선에서 지고 난 뒤 친구인 문재인 당시 후보와 같이 밥을 먹었다. 내가 상당히 신랄하게 얘기했는데 문 대통령은 자신이 진영논리에 갇혔다고 인정했다. 내가 아는 문재인이라는 인물은 결코 좌파 진영의 진보주의자가 아니다. 문재인의 성향은 인권이다. 그는 가톨릭 신자인데, 영화에 비유하자면 혁명가가 아니라 혁명가를 숨겨주는 신부가 문재인이다. 문재인 정부야말로 좌우를 아우르는 정의의 시대, 기본이 서는 시대, 인권의 시대, 민주화의 시대다. 그러니까 문재인 정부 안에 보수가 싹틀 수 있다. 문 정부 자체가 보수를 아우르는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너무 낙관적인 거 아닌가?

“이번 광화문의 촛불을 돌아보자. 촛불은 제2차 시민혁명이자 명예혁명이었다. 특히 이러한 비폭력의 명예혁명은 학생이나 지식인이 아니라 일상의 시민이 중심이었다. 과거에 소시민으로 불렸던 사람들이 ‘소’자를 떼어내고 깨어 있는 시민으로 나타났잖아. 4·19 혁명 때와 크게 다르다. 그때는 학생과 지식인이 주도하고, 시민은 사실상 방관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시민의 힘으로 시대를 바꿨다. 주체적 힘을 갖지 못하고 좌우 사이에서 왔다 갔다 흘러다녔던 시민계층이 이번에는 중심을 잡고 광장을 점령했다. 그래서 폭력이 안 일어났다. 보수 쪽에서 폭력적으로 군대를 일으키자고 선동했으나 군대가 안 일어났다. 소수의 극좌 사람이 운동논리로 떠들어도 광장에서는 안 통했다. 이거야말로 시민혁명이다. 한마디로 이분법적인 보수 진보라는 이념 틀이 끝나고, 이제 새로운 시대인 시민 주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따라서 이제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극복해야 한다. 야만적인 이분법적 싸움이 아니고, 공존과 상생의 시대에 맞는 하나됨의 시민철학이 준비돼야 한다. 문화인들도 바뀌어야지. 모든 지식이나 철학, 예술에서 시민 중심으로 하는 시민문화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는 엘리트주의뿐 아니라 순수주의와 민중민족주의 등 진영논리를 다 극복한 새로운 시민문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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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5월26일 서울 ‘30 스튜디오’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 예술감독은 “광화문 촛불 명예혁명에서 보듯 지금은 시민이 주체가 된 시대”라며 자신은 부산 가마골소극장을 중심으로 시민문화운동을 펼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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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과 흰색만 있는 시대는 불행하다

이윤택은 문화적 무정부주의자다. 회색주의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소시민 성향의 기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연극 <시민 케이>를 공연하던 1989년쯤이었다. 단원들도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가두 투쟁에 자주 나갔다. 나는 그들을 찾아서 극단으로 데리고 와서 연습을 시켰다. 그때 후배 시인인 최영철이 ‘왜 연극인이 가두 투쟁을 하는 사람을 데려가느냐’고 따지더라. 난 ‘우리는 연극으로 말한다’고 했다. 그러자 최영철이 ‘그러니까 사람들이 형을 보고 회색분자라고 한다’고 비판하더라. 난 ‘회색도 색이다. 검정과 흰색만 있는 시대는 불행하다’고 맞받아쳤다.”

-스스로를 비민중적 지식인이라고 했는데 지난겨울 촛불 때는 광화문 광장에 나가서 연극도 공연했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바뀐 건가?

“시민주의자로서의 당연한 행동이다. 그게 시민 주체가 아니라 만약에 민중민주적 정치집회였다면 안 갔을 것이다. 그때 광화문의 주체세력은 진영적 세력이 아니라 시민이었다. 게다가 멀쩡한 젊은 연극인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이들이 자기 생존권을 걸고 나가는데 나이 먹은 내가 참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블랙리스트가 문화인들을 각성시킨 것 같다.

“그렇다. 블랙리스트가 우리를 반성하게 하고 성찰하게 했다. 정부 지원금을 바라보면서 연극의 본질인 저항정신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나도 어느새 게으른 연출가가 돼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블랙리스트가 터지면서 우리가 그동안 자본 논리에 종속돼 살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거다. 잊고 있었던 저항의 힘도 살아났다.”

-지난 정권 때 어떻게 해서 블랙리스트 1호가 됐나?

“블랙리스트가 알려진 것은 박근형 연출가의 연극 <개구리> 때문이었다.(2013년 국립극단 무대에 올려진 <개구리>는 박정희-박근혜 부녀를 풍자한 장면으로 논란이 있었다. 이듬해 박근형 연출가의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국가 지원사업에 선정되고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탈락했다. 또 연임될 것으로 알려졌던 손진책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물러났다.) 그 뒤 문화예술 지원사업에서 10여명의 배제 명단이 내려왔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때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이 상부에 그중 한명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했더니 이윤택이라고 했다고 한다. 내가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렸는데 이 얼마나 무식한 논리냐.”

그는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텔레비전 찬조연설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경남고 동기동창인 그는 고교 1학년 소풍 때 문 대통령이 다리가 아픈 친구를 업고 가느라 소풍 장소에 늦었던 일화, 1986년 연극 입장권 100장을 팔아달랬더니 문재인 변호사가 판매대금 64만원(1장 1만원)과 손때가 꼬질꼬질한 팔다 남은 34장을 돌려주던 얘기 등 주로 인간적인 면모를 소개했다. 2015년 1월 문체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아르코 문화창작기금 희곡 분야에 제출한 이윤택의 시극 <꽃을 바치는 시간>이 100점 만점으로 1위에 오른 뒤에 정권의 압력으로 최종 탈락했다.

문체부 직원들, 박 정권에서 고군분투

-본인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은 지난해 최순실 게이트가 터질 때까지는 몰랐다던데?

“몰랐다. 나는 국립극단 예술감독 등 국공립단체에서 가장 잘나가던 사람이었다. 박근혜 정부 초기(2013년 5월) 숭례문 복원 축하 공연 연출을 맡기도 했다. 그때 김소영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에게 물었다. 내가 문재인 지지 연설을 했는데 괜찮겠냐고 했더니 그가 기가 찬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괜찮지 않겠어요’라고 하더라. 그 다음날 모철민 교육문화수석이 밥 먹자고 해서 만난 자리에서도 얘기했다. 그도 괜찮다고 했다. 문화재청 직원들도 연출가 이윤택의 전문성만 믿고 일을 맡겼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가 잘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 작품이 지원금 심사에서 탈락할 때도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이번엔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나이 든 사람들을 다 뺐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지, 내가 배제 대상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상한 기미가 없었나?

“초기에는 없었다. 숭례문 행사 때 문화융성을 구호로 내걸자고 요청하는 것을 내가 거부했다. 그 말은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에 했던 문예중흥이라는 용어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 고유의 느낌이 강한 비나리 상생을 내걸었다. 그때도 괜찮았다. 유진룡 당시 장관은 명동 예술극장에서 공연한 <길 떠나는 가족>을 보러 와서 개인적인 인연이 없는 나를 선배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2014년 8월 문체부 장관이 바뀌면서 분위기가 싹 바뀌더라. 국립극단 옆에 문체부 사무실이 있었는데 김종덕 장관은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도 단 한번도 연극인들과 악수한 적이 없다. 그걸 보고 앞으로 힘든 시대가 오겠구나 생각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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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5월26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새 정부의 문화정책 등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이 예술감독은 “정부는 지원만 하고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며 “앞으로는 개별적인 작품에 대한 지원보다는 유럽처럼 문화예술인에 대한 보편복지로 문화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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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원하되 간섭 말아야
건물 투자·국공립단체 너무 많아”
“개별작품 지원 방식 지양하고
유럽식 문화인 보편복지 도입을”

“블랙리스트로 고난 당했지만
연극 본연의 저항정신 살아나”
“적에 대항하는 게릴라시대 끝나
변방에서 시민문화운동할 터”


유진룡 전 장관에 따르면, 문화계에 대한 차별과 배제 등의 부당한 지시는 2013년 8월 김기춘 비서실장이 취임한 뒤부터 시작됐다. 김 실장은 “영화 <변호인>을 왜 막지 않고 나오게 놔두느냐”는 등 문화예술계에 개입하기 시작했지만, 당시 유 장관은 ‘반대편도 안고 가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첫 약속을 내세워 버텼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 직후인 2014년 5월부터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을 겨냥한 블랙리스트 명단이 내려오기 시작했다.(2017.4.29. <한겨레> 인터뷰)

-문체부 직원들이 블랙리스트 적용을 상당히 막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못 느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들이 엄청나게 막아주었다. 국립극단의 김윤철 예술감독도 그랬다. 연극 <혜경궁 홍씨>가 대박이 터져서 3년 연속 공연을 하기로 했을 때였다. 3년째 공연 장소로 예정됐던 남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쪽에서 안 한다는 얘기가 들리더라. 내가 국립극단과 문체부 쪽에 전화해서 알아봤더니 문체부 공무원이 ‘우리는 이윤택 선생에게 절대 그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 문화예술과장이 찾아와서 ‘정말 너무하다. 이윤택 감독은 평생 연극만 한 분인데 배제시키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문체부 직원이나 실무자를 죄인처럼 다뤄서는 안 된다고 본다. 유진룡 장관 이하 문체부 사람들은 박근혜 정부에서 정말 고군분투했다.”

-김기춘 등 블랙리스트 책임자들은 이전 정권에서도 문화예술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편향성이라는 것은 있었다. 그러나 이전 정권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처럼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아예 지원에서 제외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더 주는 식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 그런 면이 있었다. 그때 나이 든 사람이나 소위 말하는 보수 우파에 대한 홀대가 있었고, 그런 대접을 받은 이들이 굉장히 반발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문재인 정부는 정신적으로는 노무현 시대를 계승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르게 가야 한다. 문재인 정부 스스로 진영을 짜고, 새 진영과 패권을 형성하면 실패가 다시 반복될 것이고 무너진다.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를 가두면 안 된다. 노무현 정신은 이어받더라도 노무현과 다른 길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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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윗줄 왼쪽 다섯째)과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윗줄 왼쪽 일곱째)은 경남고 1학년 때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2012년 대선 때 이 예술감독이 문재인 민주당 대선후보의 찬조연설을 했다가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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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 술집 종업원은 거의 연극배우

-구체적으로 문화정책을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보는가?

“한마디로 말해 내버려둬야 한다. 블랙리스트는 문화예술인들을 내버려두지 않았기에 생긴 문제다. 또 건물을 짓지 말아야 한다. 광주의 아시아문화전당을 지었는데 솔직히 지금 처치 곤란이다. 건물에 투자하지 말아야 한다. 국공립단체도 너무 많이 만들지 않아야 한다. 지금 예술작품을 국공립단체가 너무 많이 제작하고 있다. 민간에 맡겨야지. 정부는 그냥 지원만 하고 간섭하지 않으면 된다. 간섭하거나 기획한다고 문화 작품이 나오는 게 아니다. 문화융성이니 융합이니 콘텐츠니 문화 브랜드니 하면서 관에서 앞장서서 성공한 것은 하나도 없다. 내버려두면 자연적으로 성과가 나온다. 그 성과를 놓치지 말고 브랜드화하면 된다. 작품 활동을 내버려두고 좋은 작품이 떠오르면 사후에 지원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대신 국가는 문화예술인에 대한 보편적 복지에 신경을 써야 한다. 문화예술인에게 의료혜택을 주고 젊은 예술인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 유럽은 다 그렇게 한다. 개별 작품을 선별해서 지원하는 게 아니라 보편복지로 가야 한다. 그래야 문화 르네상스가 이뤄진다.”

-그건 문화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인데.

“유럽은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과 러시아 등의 연극인은 연극인조합이 있다. 연극인조합에 가입돼 실직하면 실직수당이 나와서 최소한 생계를 유지할 정도는 된다. 조합원은 지하철도 공짜다. 물론 독일도 러시아도 연극인은 가난하지만, 그런 혜택이 있으니 최소한의 생계와 품위 유지가 가능하다. 우리나라는 미국식이다.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나 라스베이거스의 커피숍이나 술집,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가 배우다. 우리나라도 연극인이 대개 아르바이트 일을 하고 있다. 일본도 그렇다. 그러나 연극배우나 연출가가 아르바이트를 하면 안 된다. 정신이 너무 쪼잔해진다. 이것은 천박한 자본주의다. 천박한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하면서 고생하다가 영화배우가 되면 연극으로 다시는 안 온다. 반면에 문화예술인에게 보편복지를 실시하는 독일이나 프랑스는 따로 영화배우가 없다. 최고의 영화배우가 곧 연극배우다.”

-왜 연극인에게 그런 보편복지를 실시해야 하나?

“연극은 국민교육, 시민교육의 선두주자이기 때문이다. 첫째, 말로 하기에 모국어 훈련을 한다. 둘째, 연극을 통해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의 방법을 배운다. 셋째, 전통문화를 가르치고 인성 교육을 한다. 연극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엔터테인먼트 이전에 시민교육의 일환으로, 공교육적 역할이 있다. 초중교 교과과정에 연극이 들어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연극의 공공성 때문에라도 연극인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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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1999년 밀양시 부북면의 폐교인 월산초등학교를 단원들과 함께 밀양연극촌으로 바꿨다. 연극촌은 단원들이 함께 먹고 자면서 공연하는 연극공동체다. 이 예술감독이 밀양연극촌에서 한때를 보내고 있다. 이윤택 예술감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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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은 경남고 시절 학교 공부에는 등을 돌린 채 문예반과 합창반 활동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때부터 끼가 보였던 셈이다. 경남고에서는 최초로 1972년 2년제인 서울연극학교(현 서울예술대학교)에 입학했다. 괴짜들이 모인 학교에서 그는 연극 세계에 푹 빠졌다. 지방 학생들은 방학 때 고향에서 연극 운동을 하라는 유치진 이사장의 ‘교시’에 따라 이윤택은 1학년 여름방학 때 부산에서 첫 공연을 했다가 쫄딱 망했다. 2학기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중도에 그만둬야 했지만, 연극에 빠진 그는 서울연극학교가 있는 서울 남산 주변을 헤집고 다녔다. 이듬해 부산에서 올린 몇차례의 연극이 모두 실패하자, 친구들과 십년 뒤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는 연극판을 떠났다. 그 뒤 생계를 위해 우체국 직원, 공장 염색 기사, 한전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마산과 밀양, 충무 등을 떠돌았다. <부산일보> 편집기자가 된 1979년에는 시인으로도 등단했다.

-대선이 끝난 이후 문 대통령을 만났나?

“만나지는 않았고,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막 터졌을 때 전화 통화는 했다. 그게 가장 최근이다.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이제 (블랙리스트 탄압에서) 괜찮을 것’이라며 위로를 해주더라. 내 걱정 말고 선거운동이나 열심히 하라고 말해줬다.”

-이번 대선 때는 도와달라는 요청이 없었나?

“전혀 없었다. 지난 대선 때 내가 나서서 도와줬다가 정권으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받았으니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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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를 관람하기 위해 밀양연극촌을 방문해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안내를 받고 있다. 이윤택 예술감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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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은 문화 중립성 깊이 이해”

-정권이 바뀐데다 이 감독은 대통령과 고교 친구였으니 좋은 자리를 맡지 않겠느냐고 관측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가 많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권력의 핵심에서 문화정책을 펼쳐보겠다는 뜻이 있었다면 적극적으로 대선캠프에 들어갔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은 내 몫이 아니다. 본질을 다루는 문화예술인과 현실을 다루는 정치가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문화예술은 제시만 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정치가다. 문화예술가가 현실까지 감당하려고 하면 본질이 훼손당하고 망신을 당한다. 저는 본질을 다루는 일에 충실하되, 현실 정치에는 발을 딛지 않겠다. 변방에 가서 후진 양성을 하고, 만약 여유가 있다면 평상을 펴겠다. 길거리에 내놓고 누구나 와서 앉을 수 있는 평상 말이다. 평상을 펴서 아주 멀리 보면서 시민문화운동을 하려는 게 내 선택이다.”

-어떤 사람이 문화정책을 맡는 게 좋다고 보나?

“문화정책을 문화예술인들이 할 게 아니라 유진룡 전 장관같이 양심적인 정책 전문가가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저는 문화예술가가 문화 관련 장관이 되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유인촌씨 예에서 보듯 문화예술가들이 장관이 되면 별로 아름답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 감독과 인터뷰를 한 뒤인 지난 30일 문재인 대통령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에 도종환(63)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지명했다. 도 후보자는 시집 <접시꽃 당신>으로 유명한 시인 출신이다. 31일 전화로 이 부분에 대해 추가로 물어봤다.

-문학을 하는 도종환 문체부 장관 후보자도 문화예술가인데.

“그는 우리 시대의 뛰어난 시인이다. 그러나 그는 진영논리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니며, 문화는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사람이다. 불편부당할 뿐 아니라 문화 중립성을 깊이 이해하기에 (문체부 장관에) 적절한 인물이라고 본다. 또 국회의원으로서 의정활동을 하면서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밝혀내는 등 문화정책에 대한 경험도 많아서 나는 그가 잘하리라고 본다.”

1999년 이윤택은 경남 밀양시장한테서 폐교를 활용해보라는 제안을 받고는 즉시 30명의 단원들을 이끌고 밀양으로 갔다. 배우들이 직접 폐교에 보일러를 깔고 벽돌을 쌓았다. 교실 두개를 터서 연극 연습장을 만들고, 교장 관사와 관리인 방을 단원들의 숙소로 바꿨다. 이들은 여기에서 같이 먹고 자면서 연극을 창작하고 연습했다. 그러고는 전국 각지로 작품을 들고 공연을 다녔다. 2001년부터 매년 여름에 여는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는 대표적인 연극축제로 자리잡았다. 2009년에는 창작 스튜디오와 단원들의 거주 공간을 김해 도요마을로 옮겼다. 원시 공산부족사회 같은 연극공동체이다. 오달수, 곽도원, 김민정 등이 연희단거리패 출신이다.

-언제부터 연극에 관심이 있었나?

“어릴 때부터 서커스나 영화 등을 즐겨 보면서 커서 저쪽 분야에서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년 시절 아버지 등에 업혀서 봤던 영화 장면이 지금도 또렷하다. 어릴 때 꿈이 영화감독이었다. 특히 <홍도야 울지마라>, <눈 내리는 밤> 등 신파극을 아주 재미있게 봤다. 그래서인지 제 연극은 신파적이다.”

한겨레

연극연출가인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2013년 <오구>로 영화감독으로도 데뷔했다. 이 감독이 자신의 연극 <오구-죽음의 형식>을 토대로 한 영화 <오구>를 찍는 현장에서 촬영 지도를 하고 있다. 이윤택 예술감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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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으로 ‘전두환 물러가라’ 외쳐

-연극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뭔가?

“1987년 6월항쟁이 달아오르기 직전인 아마 그해 5월쯤이었을 것이다. 운동권 단체가 해운대 송림공원에서 대동제를 열면서 나한테 <산씻김> 공연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공연 대사에 ‘전두환 물러가라’는 대목을 넣어달라고 했다. 나는 우리는 운동권 단체가 아니고 순수 연극단체이기 때문에 개런티 없이는 공연하지 않는다면서 공연료 300만원을 요구해서 받았다. 다음날 공연을 시작하는데 공기가 이상했다. 사람이 엄청 모이고, 경찰 백골단이 둘러쌌다. 주최 쪽에서 ‘더 과격한 단체가 와서 마이크를 빼앗으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다칠 수 있으니 공연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안 된다. 연극인이 어떻게 공연을 그만할 수 있느냐’면서 거부하고, 대신 미니버스를 무대 뒤에 대기시켜 달라고 했다. 게릴라전을 준비했다. 꽹과리 치는 친구에게 무대 불이 꺼지면 사람들을 서치라이트가 비추는 쪽으로 몰고 가다가 적당한 때 도망쳐 오라고 지시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극중에서 전두환 물러가라는 대사까지 다 했다. 각본대로 극을 마친 뒤 우리는 빠져나와서 버스를 타고 도망쳤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이다. 그 시대 우리는 정말로 문화적으로 했다.”

-밀양에 갈 때는 지역으로의 문화 하방을 생각한 건가?

“솔직히 그런 생각까지는 없었다. 서울의 지하실에서 생활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생활비가 많이 들고 단원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니 연극이 안 됐다. 그래서 연극이라도 제대로 만들자는 생각에서 내려갔다. 내려가서 창작하고 공연 연습을 하다 보니까 마을 사람들이 자꾸 구경하러 오더라.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주말에 공연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료로 한 1년 하다가 나중에는 6천원씩 받았다. 마을 사람들과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교감을 맺어갔다.”

-앞으로 계획은?

“가마골소극장에 내 방을 만들었다. 가마골소극장을 중심으로 김해와 밀양을 왔다 갔다 하면서 후진 양성, 특히 어린이 연극에 시간을 쏟을 계획이다. 그리고 요즘 나는 일상으로서의 연극을 생각한다. 그동안에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연극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그 분야는 젊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는 일상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시민극과 대중극, 가족극을 해보려고 한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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