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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편집국에서]노회찬이 ‘82년생 김지영’을 선물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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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나는 천 조각을 매일 갈았지만, 저녁때면 피로 흠뻑 젖었다. 천을 들어 올리면 내 손에도 살점이 달라붙었다. (중략) 작은 실밥 하나조차도 그에게 상처를 입혔다. 실수로 남편 피부를 긁기라도 할까봐 나는 피가 날 정도로 손톱을 짧게 깎았다.’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 노벨상 수상자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핵발전소를 폐쇄해야 한다거나, 핵사고와 관련된 많은 책들이 있지만 내게는 그의 책처럼 가슴이 저릿한 작품은 없었다.

문학포럼 참가차 방한한 누르딘 파라 역시 한국에 잘 알려져있지 않은 소말리아 출신 작가다. 단지 직업적 관심 때문에 그의 소설 <지도>를 찾아 읽었다. 이 소설은 종족 갈등 때문에 살해당하는 여성과 양아들 이야기다.

‘짧게 말해, 인생은 곧 제물이다. 짧게 말해, 인생은 곧 피다. 하나의 대의명분과 하나의 나라를 위해서 누군가 흘리는 피다. 인생은 적의 피를 마셔 이루는 복수다.’

책 말미에 나오는 이 구절은 아프리카 부족 간의 피와 복수의 악순환을 요약한다. 아프리카 종족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서방과 한국 언론이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비록 소말리아 내전의 역사적 배경과 과정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지만 소설을 통해 그들의 핍진한 삶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나는, 이런 게 문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타자의 눈을 빌려 세계를 보는 것이다. 가슴 귀퉁이에 타자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모두가 타자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게 문학이다. 독자는 문학을 통해 아프리카로 갈 수도 있고, 시대를 거슬러 전쟁터나 혁명의 현장으로 갈 수도 있다.

역사가가 사건에서 뼈와 골수를 찾는다면, 문학가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가슴을 헤집는다. 역사는 머리에 대응하고, 문학은 감성에 반응한다. 역사는 사건의 현장에 독자를 구경꾼으로 부를 수 있지만, 문학은 일어날 법한 이야기로 독자를 사건의 중심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문학의 나무는 고뇌와 슬픔의 현장에서 잘 자란다. 1830년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소설 <레미제라블>을 통해 민중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가 홉스봄은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 등 이중혁명의 시대만큼 거장이라고 할 만한 소설가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때가 없었다고 했다. 이 시대는 프랑스의 스탕달과 발자크, 위고의 시대였고, 영국의 오스틴과 디킨스와 새커리와 브론테 자매가 활동했다. 러시아의 고골리와 젊은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등이 등장했다. 산업혁명으로 세상이 먹고살 만해져서 문학이 꽃을 피웠던 것이 아니다. 귀족과 사제, 부르주아는 온갖 호사를 누렸는데도, 노동자들은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았던 불화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가들은 그늘 속에서 울부짖는 목소리를 기록했던 것이다.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했다는 <82년생 김지영>은 82년생 여자와 가족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다뤘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새로운 것은 없다. 동시대를 사는 남자도 누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에서 태어난 남성이 겪은 세상과 차별을 몸에 각인하면서 살아온 여성이 산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시대의 가슴에 상처를 입힌 것들은 문학이라는 이름을 입고 불쑥 부활하곤 한다. 김탁환은 세월호 참사의 잠수부 이야기를 다룬 <거짓말이다>를 썼다. 이건 시작이다. 앞으로도 세월호 문학, 강남역 문학, 구의역 문학이 나올 것이다. 물론 하나의 사건이 이야기로 육화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때 초등학생이었던 한강이 <소년이 온다>로 5·18을 다시 소환한 것은 34년이 지난 2014년이었고, 김숨이 87년 민주화운동 때 숨진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를 소재로 <L의 운동화>를 낸 것은 29년이 지난 2016년이었다.

삶의 경계는 무한하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자신들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관계의 배열, 힘의 이동, 서열과 역할, 이익과 손해의 규모로 세상을 보기 십상이다. 그렇게 볼 때 인간은 하나의 ‘쪼가리’로 전락하기 쉽다.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소설 읽기가 도덕 및 정치이론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도덕적 정의와 법적 정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이를 ‘시적 정의’로 표현했다. 문학을 통해 한 인간의 온전한 모습을 낱낱이 볼 수 있고, 고민과 고통을 나눌 수 있다면 이걸 문학적 정의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최병준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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