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도모노우라
도모노우라의 항구. 부산을 떠난 통신사의 배는 쓰시마를 거쳐 오사카로 가는 동안 늘 바닷가 마을에 묵었다. 사진 신상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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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 요약
박제가(1750~1805)가 그렸다는 <(이하 의모도)가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도와 끝까지 청나라에 저항했던 정성공(1624~62)과 그의 어머니였다. 박제가는 왜 이런 인물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 것일까. 더구나 그림은 박제가가 그렸다고 하기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의문투성이의 그림이었다. 정성공은 네덜란드 상관이 있던 일본의 히라도에서 태어났다. <에 2층 서양식 석조 건물이 그려진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1630년 정성공은 일본인 엄마 곁을 떠나 아버지 정지룡이 있던 중국으로 간다. 이후 히라도 항구는 폐쇄되고 나가사키가 국제무역항이 된다. 국제무역을 통해 국가의 부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박제가 역시 나가사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나가사키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문화가 모여드는 국제도시였다.
박제가(1750~1805)가 그렸다는 <(이하 의모도)가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도와 끝까지 청나라에 저항했던 정성공(1624~62)과 그의 어머니였다. 박제가는 왜 이런 인물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 것일까. 더구나 그림은 박제가가 그렸다고 하기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의문투성이의 그림이었다. 정성공은 네덜란드 상관이 있던 일본의 히라도에서 태어났다. <에 2층 서양식 석조 건물이 그려진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1630년 정성공은 일본인 엄마 곁을 떠나 아버지 정지룡이 있던 중국으로 간다. 이후 히라도 항구는 폐쇄되고 나가사키가 국제무역항이 된다. 국제무역을 통해 국가의 부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박제가 역시 나가사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나가사키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문화가 모여드는 국제도시였다.
그림 <의모도>의 실체 혹은 진실에 다가가는 일은 여러 경로를 거치게 된다.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역사적 접근이 요구되고 또 그림 곳곳에 그려진 화가의 의도와 상징을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림에 후지산과 2층의 서양식 건물이 등장하는 이유와 다가와와 정성공이 안고 있는 개의 숨은 의미에 대한 접근이 그렇다. 또 하나 풀어야 할 숙제가 늘 따라다녔는데 바로 <의모도>의 과거, 즉 탄생의 비밀에 관한 것이다. 화제(?題)에 따르면 <의모도>의 원작자는 ‘최씨’였다. 그 ‘최씨’는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최북(崔北, 1712~86?) 이외에 다른 사람을 상정하기 어려웠는데, 그는 1748년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왔었다. 부산을 떠난 통신사의 배는 쓰시마를 거쳐 오사카로 가는 동안 늘 바닷가 마을에 묵었다.
마을사료관에서 발견한 오래된 술병. 맨 왼쪽줄에 초서로 ‘조선 암루’라고 쓴 네 글자가 보인다. 사진 신상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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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에 쓰인 글씨 ‘조선’
<의모도>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내심 한적한 바닷가에서 모처럼 사치를 누리려는 속셈으로 찾아든 도모노우라(?の浦)의 바다는 흐렸다. 무거운 납빛 하늘이란 저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버스 종점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자 항아리처럼 움푹 들어간 항구가 나타났다. 배들은 마을 안쪽에 굴비처럼 묶여 있었고 바다 쪽에서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비라도 내릴 태세였다. 항구의 동쪽으로 갔다. 어두운 바다를 향해 수평선과 나란히 뻗은 방파제가 파도를 맞고 있었다. 위치와 쓰임새에 맞춰 막돌을 다듬어 쌓았는데 아름다웠고 세심했다. 방파제도 그럴 수 있다는 걸 처음 보았다. 이 안쪽에 통신사 일행의 배들이 정박했을 것이다. 대략 500명에 육박하는 인원이었다. 배에서 방파제로 오르기가 쉽지 않았는지 안쪽 경사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단을 만들었다. 좁고 가팔라 서 있기조차 힘들었는데 그들은 이 계단을 밟고 이곳 도모노우라에 내렸을 것이다.
신기했다. 작은 항구라 여겼는데 통신사의 흔적이 말 그대로 ‘흔했다.’ 어딜 가나 그들이 남긴 것들이 불쑥불쑥 나타나 나를 웃게 만들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란 글씨가 걸려 있는, 누마루에서 보는 경치가 그만인 후쿠젠지(福禪寺)에도 누군가의 시와 그림들이 있었다. 모두가 그들이 남긴 것들이었다. 수백년 동안 도쿄를 왕복하는 통신사 일행 대부분이 이곳에 머물렀다니 그럴 만도 했다. 도모노우라는 바다를 오가는 배들이 묵어가는 항구이기도 했지만 ‘호메이슈’(保命酒)라는 이름난 술도 자랑이었다. 선착장 가까운 곳에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이 있었다. 문 앞에 놓인 술은 공짜였다. 술은 꿀처럼 달았다. 이름 그대로 술이라기보다는 약에 가까워 내 입엔 별로였다. 전시물이 알찬 마을사료관에도 자주 들렀다. 늘 보아도 기특한 녀석이 있었는데 바로 그 ‘호메이슈’를 담았던 술병이었다. 울긋불긋 앙증맞은 병 표면에 누군가가 글씨를 남겼다. 맘껏 휘갈겨 써 알아보기 힘든 시구 끝에 겨우 ‘조선’(朝鮮)과 ‘암루’(巖樓)라는 글자를 구별할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 일행의 흔적이었다. 누구였을까. 먼 나라의 바닷가에서 술에 취한 밤이었을까.
최북의 그림 ‘해돋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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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이 쓰는 말 ‘친구’
방파제가 내려다보이는 가파른 언덕의 작은 절에 자주 올랐다. 늘 인기척은 없었다. 절집이 서쪽을 향해 앉아 있어 늦은 오후 이곳으로 와 지는 해를 보는 것이 하루의 마침이기도 했다. 바닷가 언덕 꼭대기에 자리를 잡아 바람이 거셌고 마당에서 혼자 절집을 지키던 난로는 엎어져 연통이 나뒹굴기 일쑤였다. 쓰러진 난로를 일으켜 세우고 우그러진 연통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맞추고 나면 햇살은 항구의 바닷물 위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다 서쪽으로 빠르게 몰려갔다. 사방에 거칠 것 하나 없는 절벽 위에서의 바다는 아찔하고 충동적이었다. 망망한 바다 때문에 나는 가끔 최북의 그림 ‘해돋이’를 떠올렸다. 그저 넓고 푸른 바다 한가운데 붉은 해가 떠오르는 작은 그림. 그와 <의모도>의 관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도 여기 어디쯤에서 저 바다를 보고 있었을까.
사흘을 묵을 예정이었는데 마지막 날은 이미 예약이 차 있었다. 오래된 점포를 개조한 숙소의 2층 방 가운데를 한 아름이 넘는 들보가 가로질렀다. 바닥에 누우면 늙은 나무가 앞에 서 있는 듯했다. 바닷가 항구의 밤은 빨리 찾아와 사방은 적막했고 나무로 지은 집은 수많은 소리를 냈다. 말이라도 거는 듯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리곤 했다. 바람 탓이었을 것이다. 둘째 날 아침 주인 마쓰이씨가 방문을 두드렸다. 1회용 녹차와 과자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고 괜찮다면 자기 집에서 하루를 묵어도 된다고 했다. 바다가 주는 선물 같았다. 그녀의 집은 내 오후의 놀이터 근처였고 숙소에 딸린 1층 식당에서 보이던 앳된 청년, 생전 처음 받아본 ‘사시미’ 아침상을 어떻게 먹는 것인지 알려주곤 하던 그가 그녀의 아들이었다. 다음날 일찍 짐을 쌌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고양이 11마리와 같이 사는데 괜찮지요?”
일을 마치고 고양이들과 함께 돌아온 그들과 식당에 모였다. 아들 다이스케는 맥주를 사랑했고 마쓰이씨와 나는 와인을 마셨다. 나는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그가 어떤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왔는지 궁금했고 두 사람은 내가 왜 도모노우라에 오게 되었는지 의아해했다. 그들이나 나나 사연은 길었다. 가끔씩 고양이가 마쓰이씨 무릎에 올랐다. 내가 매일 오후 언덕을 오르던 길에 널브러져 해바라기를 하던 그 녀석들이었다. 다이스케는 절대 방문을 열어두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녀석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방으로 들어와 침대 밑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계통 없는 대화를 이어가다가, 나는 잘못 들었나 했다. 마쓰이씨 입에서 ‘친구’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분명 ‘친구’라 발음했다. ‘친구라니요?’ 내가 놀라 물었다. ‘여기 노인들은 친구라는 말을 써요. 친구, 친구. 어려서부터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끼리는 서로 그렇게 불러요. 아, 여자들은 아니고 남자들끼리만.’ 잿빛 고양이 한 마리가 벗어놓은 내 슬리퍼 위에 자리를 잡았다.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친구라니….
토모노우라 항구의 등대. 사진 신상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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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들의 자취
항구 건너편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신사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하긴 마찬가지였다. 길이 가팔라 숨이 찼다. 나무가 우거진 어둑한 숲에 끝물의 붉은 동백꽃이 떨어져 내렸다. 젊은 여자 둘이 산길을 내려왔다. 길이 좁아 걸음을 멈추고 몸을 비틀었다. 참느라고 참았는데 내 가쁜 숨소리를 들었는지 누군가 “올라가면 풍경이 감동이에요” 했다. 떨어진 삭정이가 있었고 무너진 돌무지가 좁은 산길을 메웠다. 드디어 동굴 입구 같은 하늘이 열렸다. 뒷마당만한 평지가 오르막의 끝이었다. 한쪽짜리 옷장만한 목조건물이 있었고 누군가 놓고 갔을 색색의 종이꽃이 문고리에서 흔들렸다. 몸을 돌리자 도모노우라의 풍경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방파제에 오른 통신사 일행은 신분에 따라 정해진 숙소로 나뉘었다. 대부분은 마을에 산재한 절에서 묵었다. 가장 많은 인원은 노를 젓는 자들과 노비들이었다. 그들은 따로 마련된 민가 근처에서 합숙했다. 작은 항구마을은 조선인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양측의 대표들은 후쿠젠지의 누마루에서 인사를 나누고 시를 지었고, 최북과 같은 화가들은 몰려드는 그림 주문에 입맛을 잃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도 저도 아닌 자들은 무엇을 하며 이국의 밤을 보냈을까. 저 아래 등대 근처에서 바다의 날씨를 살피던 어부들과 몰래 어딘가로 숨어들어 술이라도 한잔 마셨을까. 서로 말 한마디 통하지 않았던 사내들끼리는 어떻게 묻고 대화를 했을까. 그 밤의 풍경이 궁금했다. 새벽이 밝아왔고 다시 만날 기약도 없는 사내들은 서로의 붉은 눈을 보는 것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거친 하룻밤 끝에 영영 이별이었다. 누구는 시와 그림과 글씨를 남겼고 또 누군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흔적을 항구의 어부들에게 남겼을지도 모른다. 친구라는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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