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언론인
장면 내각에서는 그러한 결단이 결여되었던 것이 비극의 씨앗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때도 예를 들면 군 내부의 숙군 주장 등 불안요인은 컸다. 재계, 관계, 군부의 일대 혁명적 개혁이 필요했던 시기다. 박근혜 정부의 극우적 편향과 부패를 뒤이어 성립한 문재인 정권은 촛불국민혁명의 결과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준혁명적 상황까지는 아니라도 준준혁명적 상황에 처했다고 할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5·16쿠데타가 나자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의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고 말했고 장면 총리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라고 말했다. 이 두 마디가 제2공화국 종언을 상징하는 말일 수 있다. 쿠데타 몇 년 후 혜화동 사저에서 장면 박사를 장시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아주 여러 번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를 반복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장 박사는 사적으로 보면 완벽한 도덕적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의 공적 책임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이다. 집권자로서는 우선 정권을 보위하는 것이 첫째가는 책임이다. 4·19 후 과도정부의 수반이 된 허정씨는 “혁명적 과업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수습하겠다” 운운했다. 그것이 장면 내각의 시정철학으로 이어진 게 탈이다. 4·19로 둑이 무너져 홍수가 진 것처럼 한국사회는 혁명적 상황이 되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의 군사·반(半)군사 정권이 지나고 민간정부가 들어섰을 때도 얼마간 혁명적 상황이 되었다. 그때 김영삼 대통령은 하나회 척결, 전두환·노태우 구속, 금융실명제 실시 등 잇따른 반쯤 혁명적 조치로 시국을 수습하고 주도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장면 내각에서는 그러한 결단이 결여되었던 것이 비극의 씨앗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때도 예를 들면 군 내부의 숙군 주장 등 불안요인은 컸다. 재계, 관계, 군부의 일대 혁명적 개혁이 필요했던 시기다. 혁명적 사태를 비혁명적 방법이 아니라 적어도 반쯤 혁명적인 방법으로 대응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박근혜 정부의 극우적 편향과 부패를 뒤이어 성립한 문재인 정권은 촛불국민혁명의 결과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준혁명적 상황까지는 아니라도 준준혁명적 상황에 처했다고 할 것이다.
김영선 재무와 박정희 장군의 대좌
장면 내각의 제2인자가 누구였나에 관해서는 이설이 있을 수 있겠으나 경제정책의 총책임자였던 김영선 재무장관이 아니었나 한다. 김 장관이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그가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미국 측에서 제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이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경고를 했다고 한다. 김 장관은 귀국 후 박 소장을 서울 효자동 쪽에 있는 ‘백양’이라는 요정에 불러 식사를 함께 하며 관찰했다. 그가 보기에 박 소장은 체구도 작고 변변치 못한 인물 같아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쿠데타의 경고를 놓친 것이다.
미국 측의 한국, 특히 한국 군부에 대한 정보망은 치밀하다. 예를 들어, 한국군 창군의 산파역 제임스 하우스먼 대위의 역할은 컸다. 그는 한국 장성들의 후원자(patron)처럼 보였다. 민기식 전 육군참모총장이 하우스먼이 방한하였을 때 대접하는 자리에 동석해보니 평소 말이 거칠었던 민 장군이 그를 모시는 태도가 아주 각별했다.
또한 스티븐 브래드너의 경우도 특이하다. 그는 미국의 명문 대학을 나오고 한국에 왔는데 4·19 직후 명동 대폿집에서 한국 대학생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그가 미8군의 민간 정보원이 된 것이다. 농구스타 박신자씨와 결혼도 하고 오래 근무하여 민간인으로서 장성급으로 승진, 용산의 관사에서 축하연을 베풀기도 했다. 대외 직명은 미8군 사령관 정치고문.
그리고 한국군 장교들의 도미 군사훈련은 엄청난 규모이다. 여하튼 사정이 그러하기에 미국 측에서 한국의 쿠데타 음모를 놓칠 리가 없다. 이승만 정권의 전횡에 질려 미국 측이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은 밝혀진 바 있다. 장면 내각 때는 단순히 같은 장씨라서 임명했다는 소문도 있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양다리를 걸친 것이 결정적 분수령이 된 것도 같고.
장면 총리는 주로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유숙했었는데, 만약에 오늘날의 청와대처럼 500여 경호병력이 있는 곳에 머물렀더라면 수녀원으로 도피하는 일도 없었고,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다.
민주당 신·구파의 분열
4·19 후 국회가 해산되고 치러진 총선거에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작대기를 세워 놓아도 당선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압승을 했다. 자유당은 불과 몇 석, 혁신정당도 5, 6석에 그쳤다. 당시 민주당의 분열과 다툼이 민주당 정권 몰락의 부분적 요인이기도 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민주당의 분당을 무조건 탓하기도 난감하다. 우선 원내의 압도적인 의석을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이 사실상 일당체제로 가는 것이 의회민주주의를 위해 합당한가의 문제가 있다.
또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라는 뚜렷한 두 정파가 연합하여 이루어진 정당이었다. 자유당 말기에는 신파는 장면씨 중심으로 모여 회의를 했고, 구파는 조병옥씨 중심으로 회의를 하는 등 두 집 살림의 모습을 보였다. 사실상 두 정당의 연합체가 민주당이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오래 한 권오기씨는 구파는 유교적, 신파는 기독교적이란 설명을 하여 당시 화제가 되기도 하였는데 엄밀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특징 파악이었다. 구파는 한민당의 전통을 잇는 당초 지주계층 중심으로 형성된 계파이다. 거기에 나중에 신파가 합류했는데 그들은 관료 출신과 신흥 산업세력 등을 널리 포용하고 있었다. 신파와 구파는 따라서 체질이 완전히 달랐다. 그렇게 볼 때 신·구파가 분당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잘 발전했으면 우리나라 양당제가 자리잡았을 것이다. 거기에 군사 쿠데타의 원인을 돌리는 것은 좀 무리하다고 본다.
4·19는 복합적 요인의 폭발
4·19혁명은 단순히 민주주의만을 위한 혁명은 아니고 거기에 보태어 경제침체에 대한 불만과 통일에 대한 열망 등 세 가지가 합쳐져 일어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화산이 폭발하기 시작하면 연쇄폭발을 하듯 혁명도 연쇄적일 수 있다. 4·19와 5·16은 민주와 반민주의 정반대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그 바탕을 같이하는 것으로 일련탁생(연뿌리의 여러 마디에서 잎이 나오는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와 같이 볼 때 4·19 후 특히 눈에 띄는 현상이 통일운동의 고조이기도 했다. 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의 구호로 통일운동에 나섰으며 이른바 혁신정당들도 통일운동에 주력하였다. 사실 그때의 경제발전 단계에서 혁신정당들의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은 별로 실효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감동도 주기 어려웠다. 그래서 모든 혁신정당들이 통일운동에 주력했는데 크게 남북협상파와 중립화파로 나뉘어졌었다. 남북협상파는 남북이 우선 만나서 대화해 보자는 것인데 그다음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막연하다. 그때 구체적인 협상 방향을 제시한 정당은 없었다. 당시는 북의 경제가 남보다 월등히 발전하였던 때다. 따라서 통일사회당의 선전국장 고정훈씨 같은 이는 “남북협상을 주창하는 것은 김일성 서울 입경 환영대회를 열자는 것”이라고 펄펄 뛰었다.
중립화론도 애매하기는 비슷하다. 남북 간의 합의는 물론 주변 열강의 동의와 보장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떻든 당시 통일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간절했고 그 첫걸음은 남북대화일 수밖에 없고 장기적인 전망은 통일한국이 열강 사이에서 무해무탈한 중립적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단기적으로는 무리한 주장이었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이해할 수도 있는 통일 논의였다. 한반도의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을 통해 열강의 군사적 대결에 의해 결정되었다. 국내의 정치력이 이 군사적 결정을 뒤엎는다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벽을 치는 느낌일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약간 변화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명박 정권 이후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제2공화국 때의 혁신계들은 그들의 통일론 때문에 군사정권에 의하여 일망타진되어 오랜 수감생활을 하였다. 그들의 통일에의 꿈이 백일몽이었다 하더라도 오늘날 통일을 다시 꿈꾼다면 그러한 비슷한 꿈을 되풀이 꿀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실정이 아닌가.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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