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씨티은행이 ‘이 길’에 먼저 들어선 것은 외국계 은행이라는 이점 때문일 수도 있다. 씨티은행은 지난 3월 차세대 소비자금융 전략을 발표하면서 지점 80%를 줄이겠다고 했다. 씨티은행 고객 95%가량이 금융 서비스를 디지털 채널을 통해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영업점을 운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금융위기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선 이런 영업점 구조조정은 한국 은행사(史)에 유례가 없던 일이다.
씨티은행의 파격은 ‘은행 영업점 종말의 시대’가 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미 해외 분석기관들은 영업점 중심의 오프라인 은행 영업이 막바지에 달했음을 예고하고 있다. 세계적 컨설팅회사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오는 2020년까지 전 세계 모바일과 인터넷 등 비대면 채널을 이용한 은행 거래를 하는 비중은 전체 거래의 66%까지 상승한다. 100건의 은행 거래가 있다면 이 중 66건은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이용해 처리한다는 이야기다. 씨티은행은 ‘영업점 종말의 시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국내 시중은행들도 최근 몇년간 영업점을 대폭 줄였다. 지난 3월말 신한·국민·우리·KEB하나·농협등 5대 시중은행의 점포 수는 4884개로 전년 동기 대비 107개나 줄었다. 점포 축소는 곧 인력 감축으로 이어진다. 금융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국내 은행 임직원 수는 11만4775명이다. 1년 전과 비교하면 2248명이 은행을 떠났다.
그런데 국내 시중은행들은 ‘이 길’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문재인 정부가 ‘일자리 정책’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하고 ‘일자리 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등 취임 초 일자리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점포를 줄이고 인력을 감축했다가는 정권 눈밖에 날 것이 뻔하다는 게 은행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그렇다고 은행산업의 패러다임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를 멍하니 지켜볼 수도 없는 일이다. 은행들은 생존을 위해서 씨티은행이 먼저 간 ‘이 길’을 반드시 따라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정책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우려되는 점이 있다. 일자리 정책을 과거 경험과 기존 패러다임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4차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일자리 정책도 기존 패러다임의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공공기관이나 민간기업에 책상 몇개 더 넣는 구시대적 방식은 결국 가까운 미래에 없어질 일자리만 양산하는 격이다. 이는 기업의 경쟁력을 후퇴시키고 일자리를 둘러싼 사회 갈등을 다음 세대에 떠넘기는 일이다.
선진국은 이미 이런 고민을 담은 일자리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4차산업혁명의 근원지인 독일은 ‘인더스트리4.0’의 산업부흥정책과 함께 일자리 재배치와 직업훈련 등을 골자로 한 노동4.0(work4.0) 정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이 로봇세 도입을 검토하는 것도 이런 고민에서 비롯됐다. 인간 일자리를 대체할 로봇에게 세금을 물리고, 이를 복지나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봉우리가 높으면 골도 깊다. 4차산업혁명의 파고가 거센만큼 우리 사회가 치러야할 갈등의 비용도 만만찮다. 지점 80%를 줄이기로 한 씨티은행도 사측과 노동조합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씨티은행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은 앞으로 우리 사회 모두가 겪어야할 문제일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이런 고민까지 담겨야 한다. 4차산업혁명의 시대 아닌가. 노동자와 기술이 공존할 수 있는,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4.0’ 정책을 기대해본다.
송기영 은행팀장(rcky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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