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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일제, 20년간 기사 압수 471건… '어리석은 총독부' 사설땐 無期 정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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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치하 조선일보 압수·정간史]

영친왕 세자빈에 간택됐다 파혼, 민영돈의 딸 보도 기사 첫 압수

만세시위 경찰의 폭력진압 비난… 민간지로선 첫번째 停刊 당해

조선일보

조선일보가 창간 직후인 1920년 6월 1일부터 열흘 동안 집중 연재한 일제 통치 비판 기획.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등 민간이 발행히던 민족지들을 폐간시켰다. 1919년 3·1운동으로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가 강력하게 폭발하자 정책을 바꿔 1920년 봄 한글로 된 민간지의 간행을 다시 허가했다. 하지만 이들 신문이 지나친 반일(反日)로 흐르지 않도록 검열을 실시하고 다양한 사전·사후 통제 장치를 두었다.

일제가 불온하다고 판단한 신문 기사나 사설 등에 가해지는 직접적인 제재는 삭제·압수였다. 처음 압수된 조선일보 기사는 1920년 4월 28일자에 실린 '어혼약(御婚約) 있었던 민낭자(閔娘子), 지금부터의 각오'였다. 왕세자였던 영친왕 이은(李垠)의 세자빈으로 간택됐다가 일본의 정략결혼 정책 때문에 파혼당한 민영돈의 딸을 방문하여 근황과 심경을 보도한 것이었다.

사설로는 5월 17일자에 실린 '감옥과 유치장 제도 개선의 급무'가 첫 번째였다. 일제의 야만적이고 비윤리적인 형사 정책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1920년 6월 1일부터 열흘 동안 연재한 '조선 민중의 민족적 불평' 기획기사는 일제 통치를 강력히 비판해 집중적인 제재를 받았다. '골수(骨髓)에 심각(深刻)된 대혈한(大血恨)의 진수(眞髓)' '하고(何故)로 철저하게 죽이려고만''조선 통치의 대각성(大覺醒)을 촉(促)함' 등 자극적인 제목을 단 연재물은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모욕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쳐 고발했다. 이 연재가 계속됐던 6월에 8건의 기사가 압수되고, 7월에 16건이 압수되는 등 일제 탄압이 가중됐다. 1940년 8월 폐간될 때까지 조선일보에 가해진 압수 처분은 총 471건에 이르렀다.

항일 기사가 반복되고 내용이 심각하면 내려지는 더 강력한 제재는 신문 발행을 중지시키는 정간이었다. 조선일보는 1920년 8월 27일자에 실린 '자연(自然)의 화(化)'라는 사설로 민간지로서는 첫 번째 정간을 당했다. 이 사설은 미국 국회의원 시찰단이 경성을 방문했을 때 일어난 시민들의 만세 시위가 자연적인 것이었다며 이를 폭력으로 진압한 일제 경찰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1차 정간은 일주일 만에 풀렸지만 사흘 뒤인 9월 5일자에 실린 '우열(愚劣)한 총독부 당국은 하고(何故)로 우리 일보(日報)를 정간시켰나뇨'라는 사설로 다시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 이 사설은 "우리는 철두철미 배일(排日) 신문이 되지 않을 수 없다"며 총독부를 향해 '어리석고 열등하다'고 직격탄을 날렸고 끝부분에 '미완(未完)'이라고 적어 비판이 이어질 것을 예고했다. 2차 정간은 11월 24일까지 81일간 계속됐다. 이후에도 1925년 9월 8일자에 실린 '조선과 노국(露國)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로 3차 정간(38일), 1928년 5월 9일자에 실린 '제남(濟南)사건의 벽상관(壁上觀)'이란 사설로 4차 정간(133일)을 당했다.

[이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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