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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비용-편익 경제학이 만든 냉혹한 디스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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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차가운 계산기
필립 로스코 지음, 홍기빈 옮김/열린책들·1만7000원


“나는 지불한다, 고로 존재한다.”

지금 여기의 경제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연애, 결혼, 삶, 죽음까지 인간의 모든 면모에 값을 매기고 계산적 거래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경제적 인간’(호모 에코노미쿠스)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본성일까?

<차가운 계산기>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인간 본성이 아니라, 19세기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경제학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임을 폭로한다. 경제학자 필립 로스코(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경영대학 부교수)가 쓴 이 책은 비용 대비 가장 높은 효용을 안겨주는 실용적 학문이자 진리로 떠받들어지는 경제학이 인간과 사회를 시장의 요구에 맞게 재창조해왔음을 논증한다. 경제학이 현실을 분석하는 과학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만들어내는 장치라는 ‘경제학의 수행성(performativeness)’ 개념이다. 저자가 경제학, 문학, 역사와 생활 속 사례들을 종횡무진 엮어가며 펼쳐내는 생생한 이야기는 우리가 주류 경제학의 장막을 걷어내고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해준다.

보르헤스의 소설 속 비밀결사가 상상해 만들어낸 틀뢴이라는 가상세계가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현실을 대체해가는 것처럼, 경제학도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틀에 따라 행동하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밀턴 프리드먼, 게리 베커 등의 시장 중심 경제학자들은 인간과 사회를 경제학의 이익 모델로 환원시키는 틀을 만들어 냈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감정은 경제학의 권력과 언어에 따라 새롭게 조직됐으며, 공동체, 종교, 도덕, 인간관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물질적 이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이기적 개인으로 창조되었다.

전문가들이 확립한 측량법에 따라 인간의 목숨에 가격을 매기고, 한 사람이 얼마나 신용할 만한지 점수를 매기고, 환자들 중 치료받을 사람과 놔둘 사람을 점수를 매겨 구분한다. 그 결과는 국가정책부터, 사랑과 결혼, 직업 선택, 인생에서 부딪히는 숱한 문제들을 허구적인 비용-편익 분석이라는 일괄적인 틀로 결정하는 차가운 디스토피아다. 이제 ‘결혼시장’이나 ‘주택시장’이란 개념은 익숙하고 당연하다. 결혼 시장에서 질이 낮은 남녀는 알아서들 살게 내버려 두고 오직 가장 질 높은 남녀를 찾아 짝을 지어줄 때 최고의 생산성 증가를 얻을 수 있다. 집도 삶의 터전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재테크 수단이 된 지 오래다. 1980년대 초 영국 대처 정권이 국가 소유의 공공주택을 개인의 사적 소유로 이전한 지 한세대 만에 영국 주택은 부동산 투기 열풍에 한몫 챙기려는 사람들의 판돈으로 변질됐다. 전미고속도로안전협회가 인간의 목숨값을 20만 달러로 계산하자, 포드 자동차는 차량 안전 보강조치 비용이 사망자 배상금보다 더 든다는 이유로 필요한 조처를 외면했다.

이처럼 이웃도, 사회도, 자연도 무시하는 이기적 개인들이 계산적으로 소비하는 시대 속에 인간은 풍요롭지만 한없이 불행하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이 초래한 진정한 비용이다.”

책의 결론은 우리는 계산적·이기적 인간이 되라는 주류 경제학의 주술에서 벗어나, 삶의 다양한 본성들을 아우르는 새로운 경제와 경제학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지은이는 지역 협동조합 운동, 지역교환시스템(LETS), 지역통화, 이슬람경제 등에서 경제적 활동을 통해 사회적 유대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학의 싹을 탐색한다. 하지만, 물론 싹은 너무 연약하고 아직 대안은 분명하지 않다. 옮긴이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은 “인간이 만들어낸 ‘경제적 인간’이라는 가면이 실제 인간들의 얼굴을 덮어버렸고, 끔찍한 철가면처럼 실제 얼굴이 되어버렸다”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일은 당연히 막막하고 어렵지만 함께 손을 잡고 허공으로 발을 내디디면 분명 앞에 길이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지금의 디스토피아가 18~20세기 역사적 한 단계의 산물이라면, 이제는 그것이 지나고 새로운 진화가 올 때가 되었으니.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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