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프리모 레비 '릴리트'
프리모 레비 지음ㆍ한리나 옮김
돌베개 발행ㆍ347쪽ㆍ1만3,000원
작가는 서른여섯 편의 단편에서 사실과 허구를 뒤섞고 환상적 세계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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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 목공작업에 배치된 레비가 동료 티슐러와 25세 생일을 맞던 날, 비를 피해 파이프 안으로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그 시기에 여자를 가까이서 보는 일은 드물”었기에, “보는 사람을 소진시키는 달콤하고 잔인한 경험”을 한 티슐러는 그 이름 모를 여자에게 ‘릴리트’란 이름을 붙여준다. ‘밤의 괴물’이란 뜻의 릴리트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유대신화 속 인물로 신이 이브 이전에 만든, 인류 최초의 여성이다. 아담의 짝으로 창조됐지만, 신의 저주를 받고 끝없이 변신하는 삶을 살게 된다. 티슐러는 이제 레비에게 릴리트 신화를 들려준다. “신은 혼자가 됐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고독과 유혹을 견디지 못해 또 다른 연인을 얻었지. 그게 누구인 줄 알아? 바로, 악마 릴리트야. (…) 이 음탕한 관계가 끝나지 않았고, 쉽게 끝나지도 않을 거란 걸 알아야 해. 한편은 세상에서 악을 일으키는 존재이고, 다른 한편은 자신의 사랑을 전하는 존재인 거야. 신이 릴리트와 잘못을 저지르는 한, 지상에서는 피흘림과 고통이 계속되겠지. 언젠가 모두가 기다리는 구원자가 오면 그가 릴리트를 죽일 거고, 신의 탐욕도 우리의 유배 생활도 끝이 날 거야.”
릴리트의 모습은 오랜 기간 ‘유럽의 배설물’로 살아온 유대인의 삶과 닮아있다. 릴리트 신화로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에 가려진 인류 창조의 이면을 이야기하는 작가는, 타슐러의 입을 통해 유대민족의 특수성과 그들의 운명적 고통, 구원의 희망을 말한다.
20세기 증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프리모 레비(1919∼1987)의 소설집 ‘릴리트’가 국내 첫 출간됐다. 자전적 이야기와 허구의 구분이 모호한, 기존 소설과 다른 서사와 표현이 눈에 띈다. 작가가 직접 ‘가까운 과거’, ‘가까운 미래’, ‘현재’를 주제로 36편의 단편을 분류해 묶었다.
표제작 릴리트가 수록된 1부는 작가의 전작에서 일관되게 다뤄온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체험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연이 펼쳐진다. 2부는 탈출구 없는 신전에 갇혀 발버둥치는 야수를 통해 일상의 폭력을 말하는 ‘신전의 야수’, 미래 출현할 돌연변이 세계를 통해 현대 과학을 조심스레 직시하는 ‘이종교배’ 등 공상과학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탄탈럼’은 작가의 본업인 화학자로서 면모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불행을 없애고 행운을 가져온다는 물질을 둘러싼 인간의 집착과 속임수를 꾸짖는다.
3부는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이들의 이야기다. ‘분자의 도전’에서 공장 교대근무자인 리날도는 가공물을 망쳐 엄청난 “돈을 잃게 되는 충격적이고 끔찍한 불상사”를 겪고 공장을 그만둘지를 고민한다. ‘궤리노의 계곡’의 화가 궤리노는 희망 없는 프러포즈를 평생 반복한다. 신화와 고전, 사람들의 이야기와 자신의 체험을 엮어 소설을 쓴 레비는 작품 속 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마다 계속 뭔가를 더할지도 몰라.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하는 거야.”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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