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감로당길 돌담에 기대 열리는 수상한 그녀들의 공예길. 천연 염색을 한 김연화씨의 작품 앞에서 외국인들이 떠날 줄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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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과 삼청동을 잇는 옛 감고당길(종로구 율곡로3길)의 토요일 오후는 사람들로 붐볐다. 한복 입은 차림새가 어색하지만 웃음만큼은 봄날 햇살보다 밝은 관광객, 팔짱 낀 연인들, 한 걸음쯤 떨어진 채 걷는 중년의 부부…. 햇살만큼이나 환한 웃음을 머금은 사람들의 발길은 몇 걸음 가다가 멈추기를 되풀이했다. “이건 뭐로 만들었어요? 참 이쁘네!”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드는 건 50개가 넘는 작은 전시대들이었다.
10월15일까지 주말마다 열려
4월부터 10월까지 옛 감고당길은 토·일요일마다 ‘수상한 그녀들의 공예길’(이하 수상길)로 변신한다. 서울시가 우수 여성 공예인들을 발굴하고 판로를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로, 올해로 세번째 열렸다. 전시대에는 그릇 등 생활소품과 목걸이·반지 등 액세서리같은 생활공예품이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지난주에 우연히 알게 됐어요. 오늘은 아예 작정하고 왔지요.” 이진형(37)씨는 경기 파주시에서 왔다고 했다. 필요한 그릇을 사고 7살 딸에게 체험활동도 시키기 위해서다.
광진구 광장동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신유현(49)씨는 “외국인을 만나고, 재능으로 이웃에게 보답도 할 수 있어” 체험 부스를 운영한단다. 신씨는 체험 부스에서 공깃돌 만들기와 나무로봇 체험을 지도하고 있었다. 나무로봇
나무로봇 만들기에 푹 빠진 김민성 어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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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기에 푹 빠진 김민성(7) 어린이 가족도 경기 이천시에서 왔다고 했다. 아빠 진성씨는 인테리어에 필요한 소품에, 엄마 김정미씨는 액세서리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수상길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다른 프리마켓보다 참여 작가들의 솜씨가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전시대의 주인이 되려면 수상 이력을 갖춰야 한다.
세라믹 액서사리 창업을 준비 중인 안슬기(왼쪽)씨와 김명지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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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슬기(25)씨는 도자를 소재로 한 브로치와 머리끈 등으로 전시대를 꾸몄는데, 대학원에서 도자를 전공하고 있지만 수상길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서울여성공예창업소전’의 심사부터 거쳐야 했다. 심지어 ‘다산성곽길 문화창작소’ 2호에 입주한 작가이기도 한 안씨이지만 예외는 없었다.
안씨에게 수상길 참여를 독려한 선배 김명지(26)씨도 한 해 한 차례씩 열리는 ‘서울여성공예창업대전’에서 상을 받은 도자기 전공자다. 김씨는 지난해에도 수상길에 참여했다. “세라믹으로 만든 액세서리 회사를 창업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그러려면 작품에 대한 고객들의 반응을 봐야 하거든요.” 안씨는 선배 김씨의 조언으로 수상길에 나와서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이거 소재는 뭐예요? 색은 어떻게 내요?” 독특한 색감과 디자인에 빠진 한 중년 여성은 안씨의 작품을 아예 자신에게 도매로 납품하라고 조르기까지 했다.
작품을 팔고 있는 작가에게 작품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체험도 할 수 있다는 점이 수상길의 장점이다. 딸과 함께 자수 작품을 선보인 이정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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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취미 활동으로 공예가의 반열에
안씨의 전시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도 사람들의 탄성이 끊이지 않았다. 딸 주예나(11)와 함께 엄마 이정(44)씨가 지키는 전시대에는 ‘만두인형’과, 예쁜 자수로 꾸민 지갑, 연필꽂이 등이 놓여 있었다. 달걀판에 꽂힌 듯 놓여 있는 만두인형은 서로 다른 깜찍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한 10년 전쯤에 시작했어요. 목동에서 공방을 운영한 지는 6년 됐고요.” 취미로 시작한 바느질과 빈티지 페인팅, 프랑스 자수로 전문가 반열에 오른 이씨는 당장의 매출보다 작품에 공감해주는 분위기가 좋다고 했다. 이씨는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도록 작품값도 낮췄다. “강의와 주문 제작을 주로 했는데요, 서울여성공예창업대전에서 입상한 게 계기가 돼 참여하게 됐어요. 무엇보다 함께하는 작가들의 수준이 높은 게 마음에 들어요.” 이씨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하는 분위기만으로도 작가들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함께한 딸은 엄마의 작품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게 자랑스럽다며 엄마의 품에 안겼다.
박우희(39)씨는 가죽으로 만든 가방과 팔찌로 연령대가 비교적 높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색상 때문인지, 가죽이라는 소재 때문인지 고객 연령대가 높은 편이에요.” 박씨가 가죽에 손을 댄 건 5년 남짓 됐다. “누구에게 배운 적은 없어요. 가죽의 질감이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자신에게 필요한 소품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 직업을 떠나 공예인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박씨의 전시대 앞에서 한 중년 남자가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 함께 온 부인이 잡아끄는 손길도 마다하던 그는 결국 가방을 골랐고, 지갑을 열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이잖아요. 마음에 들어요.” 그는 색상과 꼼꼼한 손바느질 솜씨, 그리고 하나뿐인 디자인을 구매 이유로 꼽았다. 비싼 편이라 사는 것을 말리던 아내는 남편이 그 가방을 어깨에 걸어주자 결국 환한 웃음으로 갖고 싶었던 속내를 드러냈다.
전시대를 지키는 작가들의 사연과 이력은 전시대를 채운 작품들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했다.
천연 염색 스카프와 댕기, 비녀를 만든 김연화(33)씨의 전시대 앞에는 유독 외국인이 많았다. 김씨도 뒤늦게 공예가의 길을 걸었다. “아동학을 전공하고 직장에 다녔어요. 아버지 병간호를 하면서 삶이란 게 무엇이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건강했던 아버지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김씨는 직장을 그만뒀다. 2008년의 일이다. 작은 공방에서 염색 공부를 했는데 2014년 한복침선문화상품대전과 서울시여성공예창업대전에서 상을 받을 만큼 솜씨가 늘었다. 타이완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한국의 모습을 쉽게 보여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수상한 솜씨’ 있다면 누구나 도전 가능
김씨는 본래 천연 염색을 한 반려견용 한복과 수의로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수상길에는 스카프와 댕기 등을 들고나온다. 공예작품이 팔리려면 작품성과 함께 상품성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외국인이 많은 거리잖아요. 한복 입은 외국인들에게 댕기라는 한국만의 문화 상품도 소개할 수 있고요, 스카프는 누구나 하는 거니까….” 김씨는 매출도 적지 않다고 했다.
‘수(秀)상한 솜씨’를 갖고 있는 여성이라면 ‘수(受)상한 그녀’가 돼 수상길 전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수상한 그녀가 되면 수상길 참여뿐 아니라 판로 지원과 컨설팅 등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문의: 서울시여성능력개발원 070-4914-5541, www.서울여성공예.kr
글·사진 윤승일 기자 nagne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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