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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리벤지 포르노 처벌법'이 국회서 잠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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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연구通] 기술은 어떻게 젠더 폭력을 촉진하는가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최근 열린 걸그룹의 팬사인회에 한 남성 팬이 안경 캠코더를 착용하고 참석했다. 눈치 빠른 멤버가 이를 발견하고 침착하게 대응하여 안경은 압수했지만 남성 팬은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았다. 몰래카메라로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여 여성의 신체를 몰래 찍는 것은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 제14조 1항에 불법 행위로 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일부 팬들은 '(팬 사인회에서의 촬영은) 팬의 당연한 권리이다, 뿔테안경 쓴 남성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했다'며 억울함을 제기했다(☞관련 기사 : 공연장에서, 팬사인회에서…직접 몰카 잡아내는 여자 아이돌의 고충).

이제 몰카는 탐사보도의 도구나 연예인의 인간적 모습을 보여주는 방송용 소품, 그 이상의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고성능 카메라가 내장된 스마트폰이 대중화하면서 몰카 범죄는 2005년 341건에서 2014년 6735건으로 10년 동안 거의 20배나 늘어났다. 전체 성폭력 범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05년 3%에서 2014년 24%로 높아졌다(☞관련 기사 : 급증하는 '몰카 범죄'…처벌 규정 보완 절실). 스마트폰만 문제는 아니다. 앞서 소개한 팬사인회 사건에서처럼 안경,단추,펜,옷걸이,조명등,시계,라이터,리모컨,자동차 키 등 지극히 흔한 물건들이 타인을 감시하고 훔쳐보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폐해는 이유감스럽게도 여성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불특정한 개인, 혹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여성의 사생활과 성적 행동이 담긴 사진, 동영상이 온라인에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으며 심지어 거래된다.

스마트폰이나 초소형카메라, 소형 GPS 추적기, 실시간으로 다수에게 공유되는 소셜미디어와 인터넷 같은 전자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친밀한 관계를 맺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관계갈등이 폭력이나 범죄로 전화할 가능성 또한 변화시키고 있다. 친밀한 파트너의 통화내역, 이메일을 점검하거나 위치추적기, 몰래카메라로 감시하는 행위가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실제로 미국 대학생 조사에 의하면, 이성친구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 통화내역과 이메일을 체크하는 행위는 여성이 남성보다 3배 많이 했고, 몰래카메라와 GPS 추적기 사용은 남성에서 각각 8배, 5배 더 많았다(☞참고 자료 : Using technology to control intimate partners: An exploratory study of college undergraduates). 남성에 의한 여성 모니터링이 훨씬 적극적이고 공세적이다. 일상에서의 젠더 불평등이 정보통신기술을 만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진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호주 빅토리아 주 가정폭력지원센터의 수석연구원 우드락 박사가 최근에 발표한 논문은 이러한 이슈들 중에서도 특히 모바일 기술을 활용한 스토킹(stalking) 문제에 집중했다(☞참고자료 : The Abuse of Technology in Domestic Violence and Stalking). 스토킹은 '강압적 통제'의 한 형태로, 피해자가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따라다니기, 괴롭히기, 위협하기처럼 반복적이고 간섭적인 행동 패턴을 말한다. 친밀한 파트너에 의한 스토킹은 성폭력이나 살인 같은 심각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요인이지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호주에서는 15세 이상의 여성 5명 중 1명이 스토킹을 경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의 경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헤어진 남자친구가 지속적 스토킹 끝에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이 문제의 심각성이 알려지게 되었다(☞참고 자료 바로 가기).

논문이 소개한 '스마트세이프(SmartSafe)' 연구는 빅토리아 주에 거주하는 가정폭력 문제 자원활동가 152명, 가정폭력 피해자 46명에 대한 초점집단 면접, 온라인 서베이, 개별 면접 내용을 분석했다.

스토킹에 많이 사용된 기술로 활동가들은 휴대전화 (82%), 소셜미디어 (82%), 이메일(52%), GPS(29%) 등을 언급했다. 스토킹 피해자들은 문자 메시지(78%), 모바일 위치 추적 기술 (56%), 자살 협박 같은 전화와 문자메시지(56%), 허락 없이 문자 메시지 확인하기(47%)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 기반 스토킹은 감정적,성적 학대, 물리적 폭력, 재정적 괴롭힘 등을 동반하고 있었다.

우드락 박사는 이러한 정보통신기술에 의한 스토킹의 부정적 효과를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가해자들이 모바일 기술을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문자메시지와 전화를 함으로써 피해자의 삶에 항상 존재한다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모바일 위치추적기술은 이런 편재감을 촉진시키는 기술이다. 또한 가해자가 페이스북같은 소셜미디어에서 피해여성의 친구와 가족 등 타인을 통해 피해자를 추적하고 감시하는 '대리 스토킹(proxy stalking)'을 함으로써 피해자의 고립감과 공포를 증가시킨다.

둘째, 가해자는 가족과 친구들을 직,간접적으로 괴롭힘으로써 피해자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로를 차단하고 고립시킨다. 문자 메시지와 전화를 수없이 하고 페이스북에서 공개적으로 루머나 의혹을 퍼트리는 스토킹 행위를 피해자는 감당하기 어렵다. 결국 피해 여성이 전화번호를 바꾸고 페이스북 계정을 폐쇄하며 현실에서 집을 옮기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피해 여성의 사회적 지지를 차단하는 효과를 낳는다.

셋째, 친밀한 파트너였던 스토커들은 피해자의 가장 큰 두려움, 관심사, 비밀 등을 알기 때문에 이것을 악용한다. 모바일 기술을 통해 이러한 내용들을 즉각 가족과 친구, 지역사회에 알릴 수 있다. 특히 소셜미디어는 가해 남성이 여성을 협박하고 모욕감을 주기 위해 성적 내용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개 플래폼을 제공한다. 이런 스토킹에 처하면 피해자들은 수치심과 당황스러움 때문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이 연구는 모바일 기술이 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거나 지지 네트워크와 접촉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여성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고 학대하는 스토킹의 도구로 전락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셜미디어와 스마트폰, 인터넷이 없었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까? 그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기술에는 항상 밝은 측면과 어두운 측면이 공존하며, 무엇을 우세하게 만들 것인가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힘에 달려 있다. 우리는 기술발전으로 인해 오히려 여성들의 안전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어떤 윤리적 규범과 실질적 제도를 통해 이를 통제할 것인지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 최근 국내에서 제안된 '몰카판매금지법안'은 이러한 노력의 한 가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 마지막 자연인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전자통신기술의 사회적 통제를 위한 노력에 전자통신기술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더 많은 의원들이 관심을 갖도록 몰카판매금지법 온라인 청원에 참여하자. 국회에 계류 중인 '리벤지 포르노처벌법'이 조속히 처리될 수 있도록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적인 요청을 하자. 이런 일은 알파고도 할 수 없다.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참고서지

Delanie Woodlock, The Abuse of Technology in Domestic Violence and Stalking, Violence Against Women 2017, Vol. 23(5) 584–602.

Burke, S. C., Wallen, M., Vail-Smith, K., & Knox, D. (2011). Using technology to control intimate partners: An exploratory study of college undergraduates. Computers in Human Behavior, 27, 1162-1167.

기자 : 김성이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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